해병대 창설 시도는 1948년 10월 19일 여순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사건에 출동했던 해군 임시정대의 실전경험에서 비롯되었다. 여․순작전에 참가했던 이상규 소령은 손원일 해군총참모장에게 보고한 작전결과보고서에서 육전대(陸戰隊)의 필요성을 강력히 피력했다. 해군 간부들도 이러한 견해에 공감했고, 특히 이상규 소령과 교체하여 잔당 소탕작전에 출동했던 신현준(申鉉俊) 중령도 같은 내용을 손원일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받은 손원일은 해병대 창설에 관한 임무를 진해 특설기지사령부 참모장 신현준 중령에게 부여하고, 여기서 나온 구체적인 창설안을 갖고 신성모 국방장관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1개 대대 규모의 해병대 창설에 대한 결재를 받게 되었다.

 

해병대 창설: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해군 장병 380명의 병력으로 해병대를 창설하였다(1949. 4. 15).

 

해병대는 이러한 여순 10․19사건의 교훈에 따라 1949년 5월 5일 해병대령(대통령령 제88호) 에 의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상륙작전을 담당하고, 필요시 일반 지상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임무를 가지며 수륙양면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 10․19사건 당시 해군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10월 22일부터 해안봉쇄 및 해안공격임무를 맡게 되어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초대 해병대 사령관신현준

 

창설 작업은 1949년 2월 21일 진해특설기지사령부 참모장으로 있던 신현준(申鉉俊) 중령을 해병대사령관에, 진해특설기지사령부 교육부장인 김성은(金聖恩) 중령을 참모장에 각각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1949년 4월 15일에는 장교 26명과 하사관 54명, 그리고 병 300명 등 총 380명의 병력을 근간으로 하여 1개 보병대대를 편성단위로 하여 해병대를 창설하였다. 해병대가 창설된 장소는 진해 덕산비행장(德山飛行場)이었다.

 

제4대 해병대사령관김성은

 

해병대 창설의 법적 근거는 1949년 5월 5일 해병대령(대통령령 제88호) 의 공포였다. 해병대령의 공포로 1949년 4월 15일 이미 창설된 해병대를 국군의 한조직으로 추인(追認)하였다. 해병대령은 총 6조 및 부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법령의 조항에는 해병대의 임무와 소속, 편성과 배치에 관한 지휘권 문제가 규정되어 있었다. 그 법령의 제1조에 의하면, 해병대는 해군에 설치되어 해군작전에 의한 상륙 전투에 임할 뿐만 아니라 주둔지 경계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해병대의 수장은 해병대사령관이었으나, 해병대의 편성과 배치에 대한 권한은 해군총참모장에게 있었다.

창설 당시 해병대는 사령관 신현준 중령 참모장과 김성은 중령을 비롯하여 인사참모 소령 강대형, 정보참모 대위 김용국(金龍國), 작전참모 소령 김동하(金東河), 군수참모 대위 이병희(李炳喜), 헌병대장 중위 정광호(鄭光鎬), 제1중대장 대위 고길훈(高吉勳), 제2중대장 대위 김재수(金載洙), 정보대장(情報隊長) 강점복 소위 등으로 편성되었다. 창설 당시 해병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해병대 편성 (1949. 4. 15 현재)

 

해병대는 창설 초기 해군으로부터 편입한 장교 및 하사관 80명과 신병 300명으로 소총 2개 중대와 사령부(15명), 경리대(15명), 근무중대(70명), 정보대(10명)를 편성하고 비행장의 격납고를 수리하여 막사로 사용하면서 강력한 해병대를 육성 하위한 도약의 계기로 삼았다. 그 후 1949년 8월 1일 다시 해군 신병 제14기 중에서 440명을 해병대 신병 제2기생으로 특별모집하여 훈련함으로써 2개의 소총중대를 3개 중대로 증편하였다. 편성과 훈련은 육군식으로 이루어졌지만, 미 해병대와 같은 부대를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전대(陸戰隊)라고 하지 않고 해병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부대를 증편한 신현준 해병대사령관은 대구에서 1949년 8월 26일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과 군사협의를 갖고 경남 진주에 소총 1개 대대를 파견하여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참여함으로써 해병대의 기능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그 해 8월 1일 편성된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던 부대 역시 8월 29일 병력 550명으로 진주지역의 공비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1949년 12월 27일에는 2개 대대로 구성된 제주도부대(濟州道部隊)가 편성되어 4 · 3사건 이후 제주도에서 공비토벌작전과치안유지를 하고 있던 육군 독립 제1대대와 교대하기 위해 제주도로 떠났다.

전쟁 당시 해병대는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었고, 편성도 작전에 필요한 제주읍부대(濟州邑部隊)와 모슬포부대로 편성되었고, 제주읍부대는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과 참모장 김성은 중령을 지휘부로 하여 본부와 하사관교육대, 제3중대, 대전차포소대, 근무중대로 편성되었다. 모슬포부대는 부대장 김동하 소령의 지휘하에 제1대대(대위 김병호)와 제2대대(대위 김재주)로 편성하였다. 병력은 장교 66명과 사병 1,100명으로 총 1,166명이었고, 장비는 소총(99식, 38식, 칼빈)과 권총을 제외하면 경기관총 6정, 중기관총 3정, 60㎜ 박격포 4문, 80㎜ 박격포 2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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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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