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북한군 증강 지원
소련군의 철수발표 직후 북한의 김일성, 박헌영 일행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그의 소련행은 명목상 북한 경제지원과 군사지원문제로 논의한다고 하였지만 주목적은 무력통일론에 대한 스탈린의 의향을 타진하는 것이었다. 즉 1949년 2월 22일 평양을 출발한 김일성을 비롯한 사절단 일행은 3월 3일에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스탈린과 회견하였다. 스탈린은 김일성 등 북한대표들과 북한경제지원, 군사력 증강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고,203) 1차 모스크바 회담에서 소련과 북한은 경제협력과 무역, 1949-50년도 무역협정, 기술지원, 문화교육 분야의 협력, 북한 아오지-소련 크라스키노 사이 철도건설, 군사력 건설 등에 관한 광범한 협의를 가졌다.
경제문화협력협정은 5개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기간은 10년간이었다. 양자는 평등호혜의 원칙 하에 무역관계를 촉진하고 1년 이상에 걸친 무역고와 이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고 상호간에 최혜국 대우를 하는 동시에 문화⋅과학⋅예술 등 각 부분에 걸친 유대관계 강화를 위한 협정을 체결할 것과 전문가를 파견하고 기술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1949-1950년도 무역고 및 지불방법에 관한 협정은 김일성정권이 경제계획을 수행하는데 필요로 하는 산업시설 기계 및 부속품 원유 기관차 면화 등을 소련에서 수입하고 금속제품 화학제품을 소련으로 수출할 것을 규정하였다.
특히 이 회의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일행이 제의한 무력통일안에 대한 스탈린의 반응이 주목된다. 스탈린은 북한군이 한국군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제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즉 “북조선 인민군은 남조선군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확보치 못하고 있고, 또 수적으로도 불리하며 남조선에 아직 미군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남침을 하면 당연히 미군이 개입할 것이고, 아직은 소련과 미국의 38선 분할에 관한 협정이 유효한 상황이기 때문에 먼저 위반하면 미군개입을 막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이 시점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침략을 격퇴하는 경우에만 이루어 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즉 38도선에서 한국군이 공격해 오는 경우 반격만을 허용하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따라서 이 무렵 소련이 추진하고 있던 대북한 군사정책은 북침에 대비한 방어력에 비중을 두어 북한군을 증강시킨다는 것에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소련은 이 회담에서 북한의 경제부흥발전 계획을 위해 북한에 4,000만 달러의 차관 및 기술지원, 전문가 파견 등의 문제에 합의하였으며, 이때의 차관액 거의 대부분이 무기 및 장비구입에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이후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소총 15,000정, 각종 포 139문, T-34 전차 87대, 항공기 94대 등 많은 군사장비를 인도 받게 되었으며, 특히 항공기와 전차 등의 지원은 이미 남한과 현격한 전력 격차를 유발시키고 있었다.
스탈린은 회담에서 남한의 군사력, 주한미군, 38도선 무력충돌 등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북한의 해군과 공군 지원, 북한군중 일부를 소련군사학교에 위탁 교육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여기에서 합의된 구체적인 지원사항은 곧이어 3월 12일 개최된 김일성과 소련 국방상 불가닌(Nicholai A. Bulganin)과의 회담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이와 같은 합의 내용을 골격으로 3월 17일에는 소위 ‘지원의 성격, 소련에서의 북한군 교육 및 경제관계의 발전과 기타 문제들에 관한 조⋅소협정’이 체결되었다. 당시 이들간에는 ‘경제⋅문화협정’이 체결된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당시 군사비밀협정도 체결되었을 것이라는 일부의 추론만 있었으나, 이번에 공개된 크레믈린 문서에 의해 당시 회담과 협정의 중점이 군사력 지원에 있었음이 밝혀졌다.
김일성이 대남 전력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도 이러한 군사장비를 보유하게 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9년 4월 7일 모스크바방문을 마치고 평양에 돌아온 김일성은 “우리정부 대표단은 소비에트 동맹과 경제⋅문화협조에 관한 모든 교섭을 성공하고 돌아왔습니다. 공화국 남반부로부터의 외국군대의 철거와 조속한 조국통일과 완전독립을 얻기 위한 애국투쟁을 더욱 광범하게 전개할 것을 나는 전 조선인민들에게 호소한다”는 내용을 발표함으로써 소련과의 회담에서 큰 성과를 얻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였다.
스탈린은 김일성 일행과의 회담에서 북한과 중국 문제는 양국간의 회담을 통해 논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관한 내용은 스티코프가 스탈린에 보낸 보고서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며, 북한-중국과의 회담에서도 무력통일론이 협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1949년 4월 28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대표 겸 북한군 정치지도부 대표자 김일이 중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고강(高崗), 주덕(朱德), 주은래(周恩來) 뿐만 아니라 모택동(毛澤東)과 3월의 스탈린과의 합의내용 및 북한의 무력통일 방안 등에 대하여 협의하고 중공군 내의 한인사단의 북한군 편입문제를 확정지었다.
모택동은 이때 한반도 정세에 대하여 “한국에서의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빨리 끝날 수도 오래 끌 수도 있다. 지구전은 북한에 유리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이 끼어들어 남한정부를 지원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들 바로 곁에 소련이 있고 우리들이 만주에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 없다”라고 말하고, 이 경우 “중공군을 파병하여 일본군을 격퇴시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시점에서는 국제정세가 별로 유리한 상황이 아니며,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군과 전투 중에 있으므로 행동을 일정기간 유보하도록 김일성에게 권고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한인사단에 대하여는 2개 사단의 이관에 동의하였으며 나머지 1개 사단은 중국남부에서 국민당과 전투 중에 있으므로 후에 인계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모택동으로부터 회담내용을 통고 받은 주중소련대사관의 코발료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비밀전문에 의하면, “모택동과 김일 회담에서 중국은 병력과 장비가 필요하면 한인병력과 장비를 지원해 줄 것이지만, 아직 남침시기는 기다려야 할 것이며 만약 1950년 초 국제정세가 유리해지면 남침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요약 보고한 내용에서도 재확인된다. 이 회담은 만약 일본군이 투입된다면 이에 대응하여 중국군도 파병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천명된 점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북한과 중국이 합의한 구체적인 회담 내용에 대해서는 모택동과 김일성이 각각 1949년 5월 14일과 17일에 소련 대사를 통하여 스탈린에게 전달되었다. 이로써 북한, 소련, 중국간에는 1949년 3ᐨ4월 일찍부터 한반도 무력통일 방안이 논의되고 있었으며, 다만 그것의 이행은 북한군 전력의 미비, 주한미군의 문제, 그리고 중국내전의 상황 등으로 인하여 유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련은 주한미군이 철수한 직후인 1949년 8월 김일성으로부터 “미군이 철수한 이후 38도선은 의미가 없고 북한군의 전력이 우세하며, 더욱이 남한이 조국전선의 평화제의를 거부하고 있으므로 우세한 북한군의 전력을 바탕으로 공격할 수 밖에 없다”는 무력남침의도를 밝혔다. 이에 대해 소련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내세웠다.
현 상태로는 북한은 남한과 비교해 볼 때 남침에 필요 불가결한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바 현재 남침은 준비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투적인 시각에서 이를 승인하기 매우 어렵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투쟁을 위한 현안의 과제는 반동체제의 파괴와 전 한국의 통일과제 달성을 위한 남한에서의 전 인민 무장봉기 확산전개와 향후 북한군의 강화에 최대한의 힘을 집중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소련은 남침을 위한 군사력이 확보되지 못하였다는 점을 들어 향후 남한에서의 무장봉기를 확산시키고, 북한군의 전력을 강화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요컨대 소련은 남침을 단행할 정도로 군사력이 확보되지 못하였다고 보고 있었다. 또한 소련측은 곧이어 북한의 삼척 ‘해방구’ 건설 문제와 옹진반도 점령 계획 등 제한적인 공격계획에 대해서도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현재 한반도에는 2개의 국가가 존재하며 그중 남한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되어 북한의 공격 시 미국이 남한에 무기 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남한을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 또 북한의 대남 공격은 미국에 의한 대소련 모험전에 이용될 수 있으며,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북한은 아직 남한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남한은 이미 상당히 강한 군대와 경찰을 창설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볼 때 이때까지 소련은 북한의 군사력이 승리할 만큼 강하지 않다고 분석하고 있었고 반면 김일성은 남한전력을 높지 않게 평가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련이 당시의 상황을 위와 같이 판단한 이유는 자칫 대남 공격이 장기화될 경우 미군개입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는 점에 유의했기 때문이다. 이에 9월 24일 스탈린은 스티코프 대사를 통해 소위 민주기지를 강화, 즉 남한 내에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고 소위 ‘반동체제’의 파괴와 남한에서 ‘인민봉기’의 확산, 북한군의 증강에 최대한 힘을 집중하도록 전달하였다. 이는 당시까지 소련이 갖고있는 북한에 대한 기본시각이었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한편, 1949년 3월 모스크바회담 이후 북한군의 전력은 크게 증강되고 있었다. 이에 고무된 김일성은 1949년 8월 12일 일시 귀국하는 스티코프 대사에게 대남 선제 공격을 준비해야겠다는 문제를 제안하였다. 미군이 철수함으로써 38도선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또 38도선 분계선 충돌로 인해 북한군의 전력이 우세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더욱이 남한이 조국전선의 평화제의를 거부하고 있으므로 무력침공을 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김일성에 의해 제시된 구체적인 작전으로는, 즉 옹진반도의 남한측 군대를 격파하고 그곳에 주둔해 있는 2개의 연대를 격파하고 옹진반도를 점거하며 그곳을 기점으로 동쪽 개성(開城)까지 영토를 차지한다는 것이었으며, 만약 남한측 군대가 북한측의 기습으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다면 남쪽으로 계속 진격해도 무방할 것이고, 여전히 사기가 저하되지 않고 있다면 방어선을 단축하고 경계선의 방비를 더욱 굳건히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에 반대의 입장이었다. 즉 스탈린은 “다음은 8월 12일 면담에서 당신들이 제기했던 문제에 관한 모스크바의 입장이다. 현 상태로는 북한은 남한과 비교해 볼 때 남침에 필요 불가결한 우월한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바 현재 남침은 준비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투적인 시각에서 이를 승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투쟁을 위한 현안의 과제는 첫째, 반동체제의 파괴와 전 한국의 통일과제 달성을 위한 남한에서의 전인민무장봉기 확산전개와 둘째, 향후 북한군의 강화에 최대한의 힘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스티코프 대사에게 지시하였다.
김일성은 대남 공격이 소련의 반대로 실현될 수 없게 되자 38도선에 가까운 강원도 삼척에 ‘해방구’ 건설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역시 소련의 반대에 부딪히자, 또 옹진반도 점령 계획을 제시하였다. 옹진 지역의 확보는 장차 공격작전에 유리한 발판이 될 뿐만 아니라 전선을 120㎞나 축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 역시 북한의 전력이 아직 미비하다는 소련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그 반대의 구체적인 이유는 “첫째, 현재 한반도에는 2개의 국가가 존재하며 그중 남한은 미국 및 기타 국가에 의해 승인되어 북한의 공격 시 미국이 남한에무기 탄약 공급뿐 아니라 일본군의 파견을 통해 남을 지원할 가능성이 있으며, 둘째, 북의 대남 공격은 미국에 의한 대소 모험전에 이용될 수 있고, 셋째, 정치적 측면에서 북의 공격은 남북한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으나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북은 아직 남에 대해 압도적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넷째, 남한은 이미 상당히 강한 군대와 경찰을 창설하였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군사 작전 면에서 전쟁이 지구전이 될 경우 미군의 개입 동기를 제공하게 된다는 점에 유의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소위 민주기지를 강화, 즉 남한 내에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고 ‘반동체제’의 파괴와 남한에서 인민봉기의 확산, 북한군의 증강에 최대한 힘을 집중하도록 스티코프 대사를 통하여 지시하였다. 또한 소련 공산당은 중앙인민위원회 회의를 통해 1949년 9월 24일 남한공격 시기가 적절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평화통일의 가능성을 너무 도외시하지 말 것을강조하고 있었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소련은 1949년 9월 시점까지도 북한의 무력통일론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소련은 이 시점에서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합의된 사항에 관하여 조심스런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북한의 공세로 인하여 미국이 자극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단히 유의하고 있었다.
② 남침기지로의 정책전환
1949년 후반에 접어들면서 동서진영은 소련의 원폭 보유, 중국공산정부 수립, 중⋅소회담 등의 문제로 큰 변화를 맞는다. 미국은 심각한 대공 위기감을 갖고 이에 대처하기 위해 급격히 재무장정책과 대소 강경정책을 검토하는 가운데 군사원조 계획으로서 상호방위원조안을 확정한다. 이 시점 미소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역시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 때문이었다.
미국은 1949년 9월 3일 미 공군정찰 편대가 일본에서 알레스카까지 정찰하여 소련의 방사능실험 흔적을 탐지하였고, 그 실험은 8월 29일 무렵 실시된 것으로 분석되었다. 소련의 핵 개발은 미국이 더 이상 핵무기의 독점국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소련과 동북아의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 미국은 전반적인 대외전략을 재검토하게 된다.
이러한 국제적 긴장 속에서 소련은 북한이 스탈린의 방침과 무관하게 1949년 10월 14일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옹진을 공격하자, 이 사태처리에 대해서 미국보다 훨씬 더 조심스런 입장을 피력하고 있었다. 즉 소련 중앙인민위원회는스티코프에게 옹진공격의 사전계획과 행동에 관하여 보고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주의를 하달하였다.
질책을 받은 스티코프는 “내무상 박일의 지령에 따라 제3국경경비여단장이 남한이 점령하고 있는 38도 이북에 위치한 주요 두개의 고지를 탈취할 준비중”이라는 사실을 보자긴 대령으로부터 보고 받았다고 설명하였으며, 또 10월 31일 보자긴 대령이 감제고지이며 38선으로의 유일한 연락로인 은파산을 탈취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는 내용을 아울러 보고하였다. 그러나 소련 중앙위는 11월 20일 재차 스티코프에게 “38선상의 충돌을 일으키지 말라는 본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재삼 강조하였다.
1949년 말의 시점은 미국과 소련이 각기 유럽과 아시아에서 뿐 아니라 세계전략의 구도를 재편하고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그와 같은 소련의 대북한 방침은 선급한 북한의 국지적인 공세로 인하여 사태를 그릇 치지 않으려는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소련은 북한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복안을 검토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즉, 소련은 내부적으로 한반도에 있어서 장차 다가올 수 있는 전쟁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마련하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될 경우에 대비해 북조선에 있는 해군기지와 공군부대를 폐쇄할 것. 우리가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또한 적을 심리적으로 무장 해제시키며 전쟁이 시작될 경우 우리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소련은 전쟁의 가능성을 예상하고 있었으며 그리고 전쟁이 발발할 경우 대외적 명분상 소련의 개입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부적으로 소련은 전쟁에 대비하여 대북 지원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면서 다른 한편, 중국과도 그 문제를 협의를 하였다. 스탈린은 1949년 12월 16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중국 모택동과 1950년 2월 17일까지 2개월 동안 회담을 가지고 ‘중소우호동맹상호조약’, ‘장춘 철도⋅여순 및 대련에 관한 협정’, ‘차관협정’을 체결하였다.
스탈린⋅모택동 회담은 표면적으로는 발표된 바와 같이 ‘중⋅소’ 양국간 문제에 국한된 것 같으나, 당시 국제 및 동아시아 정세로 보아 냉전체제하의 양국간 결속 다짐은 물론 세계 공산혁명을 위한 역할 분담이 협의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으며, 또한 소련외교문서에 나타난 선제공격에 관한 김일성의 발언으로 미루어 북한의 전쟁지원 문제가 심도 있게 다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스탈린⋅모택동 회담은 소련의 핵실험 성공과 중국 공산정부 수립에 따른 세계전략 재편과 깊은 관련 속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소⋅중 회담 직후 스탈린이 스티코프에 하달한 전문에 의하면, 즉 “모택동 동지와의 회담에서 우리는 북조선의 군사력과 방어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이를 도울 필요성과 방안에 대해 논의했음을 통보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소⋅중간에 긴밀하게 북한군의 병력 증강에 대해 협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소련은 1950년 2월 북한의 추가 3개 사단용 각종 장비, 탄약, 기자재 등을 도입하기 위하여 1951년도 차관 1억 3,000만 루블을 1년 앞당겨 집행할 수 있도록 하는데 합의하였으며, 이들 장비의 도입은 1950년 4월 김일성의 제2차 모스크바 회담을 계기로 더욱 촉진되었다.
1950년 4월 스탈린은 김일성과의 비공개회담에서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그리고 공산당 내부문제 등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이때 스탈린의 입장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의 통일과업을 위한 선제 남침을 개시하는데 동의’ 하였으며,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북한과 중국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측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 하기로 합의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의 조건적인 수용에 따라 김일성은 5월 13일 모택동을 방문하여 전쟁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지침, 미군과 일본군의 참전 가능성 문제 등에 관하여 토의하였다. 이날 김일성 일행은 모스크바 회담 결과를 설명하자,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직접 설명을 듣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모택동의 요청을 받은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북한동지들과의 회담에서 필리포프(스탈린의 가명) 동지와 그의 측근들은 현 국제상황이 변하였으므로 남북한 통일사업에 착수하겠다는 북한 동지들의 제안에 동의하였음. 이와 관련하여 이 문제는 중국동지와 북한 동지간에 사전에 합의가 되어야 하며, 만약 북한측과 중국측이 문제 해결방법에 있어 이견을 보일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논의가 이루어 질 때까지 미루어 두어야 함. 회담내용에 관한 사항은 북한측에서 귀하에게 자세히 설명할 것임.
스탈린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창에 동의하지만, 중국이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결국 김일성 일행은 스탈린의 조건사항인 모택동으로부터 합의를 얻었으며 그밖에 조⋅중 우호동맹상호원조 조약은 통일 후에 체결하기로 합의하고 5월 16일 평양으로 복귀하였다.
이렇게 소련군 장교들에 의해 편성 훈련되고 소련에서 공급한 장비로 무장하는 등 소련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북한군은 1950년 전쟁직전까지 육군 10개 보병사단, 해군 3개 위수사령부, 공군 1개 비행사단 규모의 군대로 성장하였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복귀 후 곧 남침공격 작전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도록 총참모부에 지시하였고, 결국 총참모장 강건(姜健)과 새로 부임한 바실리에프 고문단장이 중심이 되어 1950년 5월 29일에 이를 완성하였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바실리에프 중장은 1950년 2월 23일 북한에 도착하여 ‘조선인민군’ 수석군사 고문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으며, 예하에 고문단 본부요원과 총참모부 담당 고문 십여 명이 선발대로 먼저 도착하여 전쟁계획과 북한군 운용계획을 수립하였다. 남침 작전계획은 1개월 기간으로 3단계로 구성되었고, 마지막으로 6월 16일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의 동의를 받은 후 남침 일자는 6월 25일로 정해졌다.
이 결정과정은 바로 북한이 왜 1950년 6월에 공격하기로 하였는가를 시사해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과 중국의 입장에서는 핵의 보유, 중국과의 유대 강화 문제 이외에도 당시 논의되던 미국과 일본사이의 평화조약에 자극을 받았을 것이며, 전 한반도로의 공산통제 확대로 미⋅일 동맹체제의 전략적 가치를 상쇄하려고 의도하였다.
소련이 북한⋅중국과 전쟁계획을 최종적으로 결정함에 있어 가장 고심한 사항은 미군의 개입 가능성 문제였다.240) 북한정권과 소련고문관들은 8월 15일 해방 5주년 기념일까지 서울에 통일 한국 새 공산정부를 수립하는데 시기적으로 알맞게 남한 점령을 완료하고 선거를 마칠 수 있다고 예상하였다.
즉 1950년 6월말에 전면 공격으로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한국정부를 전복하는 한편 북한군이 신속히 남해안까지 전개하여 증원되는 미군의 한반도 상륙을 막아 1개월 내에 전쟁을 종결시키며, 8월 15일 해방 5주년 기념일까지 서울에 통일된 인민정부 수립을 목표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바실리예프 중장을 비롯하여 소련 군사고문관들은 공격 직전까지 북한군에 배속되어 전쟁준비에 참여하다가 북한군의 공격작전이 예정대로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고 소련의 개입흔적을 지우기 위해 후방으로 잠적하였다. 이후 1950년 말까지 평양과 소련 외무성간의 전보교신은 최소한으로 자제되고 있었다. 이를 통해볼 때 소련 역시 전쟁을 통한 대한반도 공산혁명의 의지를 분명히 갖고 있었고 또 전쟁의 최종결정 단계에까지 깊이 개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