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0월 2일, 소련은 중국정부 승인을 발표하고, 광동(廣東)에 있는 국민당 정부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중화인민공화국정부와 대사를 교환하기로 결정하였다. 국민당 정부는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민주주의 국가들이 중국 공산정권을 승인한다면 민주주의 진영에 정신적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우려했지만,262) 1950년 1월 6일, 영국정부는 중공을 승인했다.
공산당은 거대한 중국을 장악했지만 이를 통치하는데 있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였다. 아직 내전이 종결되지 않았고 국가적 기틀이나 경제건설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광동, 광서, 사천, 귀주(貴州), 운남, 서강(西康) 등의 대부분 지역과 산서, 호남, 호북성 일부지역, 대만과 해남도를 비롯한 연해 도서지역 등 전 중국의 약 1/3 가량이 국민당 정부 아래 있었다. 공산당 세력이 장악한 지역에서도 국민당 잔여 병력이 아직 저항을 하고 있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중국 인민해방군은 1950년 4월까지 전쟁을 수행했다. 더욱이 경제적으로 물가가 폭등해서 국가경제와 인민들의 생활에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대외적으로도 미국은 중공을 경제적으로 봉쇄하고 외교적으로 고립을 시켰기 때문에 1949년 12월, 모택동은 소련을 방문하여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지도자들과 회담하면서 평화를 보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중공이 전쟁 전 수준의 경제회복과 전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3년 내지 5년간의 평화로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263) 이처럼 중국은 공산정부가 수립된 후 경제복구, 토지개혁, ‘대만해방’, 반공세력 토벌, 티벳 점령 등의 과제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급선무는 경제복구였다.
중공군은 ‘대만해방’을 위해 1949년 10월 25일, 제3야전군 예하의 제10병단 소속 제28군단, 제29군단의 1만여 명으로 하여금 국민당 전진 방어기지인 금문도(金門島)를 공격했지만 국민당군이 결사적으로 방어하고 중공군의 수송수단 미비 등으로 실패하였다. 그 이듬해도 중공은 국가전략의 목표로 ‘대만해방’을 삼았다. 이를 위해 1950년 3월 1일, 화동군구(華東軍區)를 새로 창설하였고, 1951년 하반기쯤 대만을 완전히 점령할 계획이었다.266) 이러한 구상이었으므로 1950년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하였을 때, 모택동은 중공이 대만을 해방시킨 이후에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면 중공이 북한에 대해 충분한 지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49년 5월, 주은래(周恩來)는 비공식적으로 미국에게 원조요청을 포함한 사실상의 외교관계 수립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중공대표단이 모스크바에 방문하기 직전 모택동은 외교정책에서 소련측에 ‘의지할’ 것을 발표했다. 1949년 6월 30일, ‘인민민주전선에 관하여’라는 연설에서 모택동은 “우리는 일방(소련)으로 경사해야 한다. 모든 중국인은 예외없이 사회주의나 제국주의 중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 양다리를 걸치는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제3의 길이 있는 것도 아니다”고 대소일변도 노선을 선언하였다. 그는 그 이유를 지금까지 달성한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한 국내적 필요 때문임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중공이 분명히 소련진영에 속한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외교노선의 제1방침은 중⋅소우호관계를 기초로 공산국가와의 우호증진을 추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내전을 거치면서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중국대륙은 여전히 각 지방에서 활동한 군부의 영향력이 컸다. 동북지방에서도 동북군사령관 겸 정치위원이었던 고강은 내전 당시부터 만주지역에 세력기반을 구축하여 중앙당을 무시하고 소련과의 독자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공산당 정부수립 후 중앙집권화 정책에 도전하는 세력들이었다. 그렇지만 고강, 요수석(饒潄石)를 중심으로 한 만주지역 세력들은 친소 경향을 띠었기 때문에 중공정부의 동북아전략과 다르지 않았다.
1949년을 지나면서 중⋅소관계는 더욱 견고해졌다.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 초청인사들에게 국민당과 투쟁할 때 지원하지 못한 소련의 실수를 사과하고, 중국의 경제재건과 공군력 증강을 위해 지원해 줄 것에 합의했다. 1950년 2월 14일 모택동 중공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한지 2개월 후, 주은래 수상 겸 외상이 모스크바방송과 북경방송을 통해 중⋅소조약 체결을 정식 발표하여 미국과 극동 각국을 비롯 전 세계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269) 중국측 입장에서는 5년간 3억 달러의 차관, 방위공약을 얻어내는 대신 몽골뿐만 아니라 북부와 서북 중국에 대한 소련의 지속적인 반식민지적 활동을 감수하는 굴욕적인 것이었지만, 소련과의 이데올로기적 연대, 미국의 위협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소련일변도 정책은 중공의 대외정책에서 독자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소련은 중공을 강력한 위성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 결과 1950년 5월 1일, 유소기(劉少奇)의 메이데이 연설에서처럼 중⋅소동맹조약이 평화로운 국제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중국은 국내건설에 전념할 수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다만, 중공측은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며 일본과 북중국을 잇는 교두보로 이해했다. 또한 미국이 동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오랜 꿈을 가졌다고 인식했다. 한반도로부터 미국의 침략에 대한 공포를 완화시키기 위해 중공이 베트남을 지원했던 것처럼 북한을 지원하려 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항일전쟁시 동북지역에서 9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과 함께 투쟁한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을 지원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나라는 소련이었다. 소련이 군사고문단을 보내고 군수품을 지원하는 데에 중공은 불개입 입장이었다. 소련이 북한과 몽골지역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는 반면, 중공은 동남아시아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당시, 중공은 북한에 개입하기보다 베트남의 호찌민을 지원하여 경제원조, 무기원조,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중공 측의 승리가 한국에 즉시 영향을 미친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하였지만, 중국이 소련의 정치 혹은 군사, 경제적인 범위 내에 들어간 사실은 세계적으로 거대한 파동과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1950년 1월 말경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 국가들은 유엔에서 중국대표로 대만정부를 대신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으나, 중소동맹협정 체결로 세계 냉전이 본격화되었고 아시아에서 그 영향이 두드러진 곳이 한반도였다.
소련이 한국을 아시아에 공산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한 전략적 기지로서 이용하려는 구도를 가지고 있었고, 중국 공산당이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상황은 북한측이 남침계획을 구체화하는 데 유리한 요소로 작용한 반면에,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전략구도에서 위험에 노출되었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내에서 지반을 다지기 전에 한국의 분단상태가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