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합작운동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서 좌 우익의 편파적 노선을 극복하고 좌우합작이 필요하다는 여운형과 김규식의 논의와, 소련과 협상을 재개하고 남한에서 미국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미 군정의 의도가 맞물려서 추진되었다. 1946년 6월 30일, 미 주둔군 사령관 하지는 좌우합작노력에 공식적인 지지를 나타냈다.(여운홍, 『몽양 여운형』, 청하각, 1967, p. 216; 이정식, 「여운형 김규식의 좌우합작」, 『신동아』, 1987. 5, pp. 666-668.)
당시 이승만이나 김구 등 우익세력은 신탁통치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일으켰고, 소련에도 적대적인 입장을 띠었다. ‘중경 임시정부’는 탁치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자율적인 과도정권을 수립하려고 하였으며 좌익세력 또한 미 군정과 우익세력의 견제를 받아서 쇠퇴되어 갔다. 그러나, 중간세력들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를 계기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면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좌우합작운동은 좌우와 미⋅소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자주노선을 내세우면서 민족적 명분을 얻을 수 있었다. 식민지 시기에도 민족주의와 협동전선을 표방한 경우가 있었다. 1920년대의 중국에서 민족유일당운동과 국내의 신간회운동,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대일전선통일동맹, ‘임시정부’ 등의 성과로 나타났다.(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도산안창호자료집』 3, 1992, p. 264; 도산기념사업회, 『도산 안창호』, 삼협문화사, 1973, p. 6; 유병용, 「일제하 중도파 민족주의」, 『한국근현대사강좌』 9, 1997, pp. 78-79; 홍선희, 『조소앙의 삼균주의 연구』, pp. 41, 47-48)이러한 여러 좌우합작운동은 좌우익이나 세력내의 주도권 확보를 둘러싸고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 해방 전까지 단일한 통일전선의 결성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각 정치세력들 사이에 이념적 수렴이 이루어져서 해방 후 재차 좌 우익의 통합을 추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946년 10월 7일,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익 5원칙(①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하는 삼상회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미소공위 속개 촉진 운동을 전개하야 남북통일의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매진하며 북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과 직접 회담하여 전국적 행동통일을 기함. ② 토지개혁(무상몰수⋅무상분여), 중요 산업 국유화, 민주주의 노동볍령 급 정치적 자유를 위시한 민주주의 기본 과업에 매진할 것. ③ 친일파민족반역자 친팟쇼 반동 거두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테로를 철저히 박멸하며 검거, 투옥된 민주주의 애국지사의 즉시 석방을 실현하야 민주주의적 정치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것. ④ 남조선에 있어서도 정권을 군정으로부터 인민의 자주기관인 인민위원회에 즉시 이양할 것. ⑤ 군정 고문기관 혹은 입법기관 창설에 반대할 것(『조선일보』, 1946. 8. 2).)과 우익 8원칙(①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노력할 것. ②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할 것. ③ 소위 신탁 문제는 임정 수립 후 동 정부가 미소공위의 자주독립 정신에 기하야 해결할 것. ④ 임정 수립 후 6개월 이내에 보선(보통선거)에 의한 전국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 ⑤ 국민대표회의 성립 후 3개월 이내에 정식 정부를 수립할 것. ⑥ 보선을 완전히 실시하기 위하야 전국적으로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 자유를 절대 보장할 것. ⑦ 정치⋅경제⋅교육 모든 제도⋅법령은 균등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야 국민대표회의에서 인정할 것. ⑧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징치하되 임시정부 수립 후 즉시 특별법정을 구성
하여 처리케 할 것(『동아일보』, 1946. 7. 31).)을 절충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정부수립, 토지개혁에 있어서 몰수⋅유조건 몰수⋅체감매상, 친일파 처리안은 입법기구에서 처리, 입법기구 구성 등 7원칙을 발표하였다.(①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삼상결정에 의하야 남북을 통한 좌우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②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할 것. ③ 토지개혁에 있어 몰수 유(有)조건 몰수 체감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사회노동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 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야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④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기구에 제안하야 입법기구로 하야금 심리 결정하야 실시케 할 것. ⑤ 남북을 통하야 현정권하에 검거된
정치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로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⑥ 입법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기능과 구성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안을 본 합작위원회에서 작성하야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⑦ 전국적으로 언론⋅집회⋅결사⋅출판⋅교통⋅투표 등의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독립신보』, 1946. 10. 7).)
‘합작 7원칙’에 김규식, 여운형, 박건웅, 장권, 원세훈, 안재홍, 김붕준, 최동오가 개인자격으로 서명하였다. 이에 대하여 공산당은 ‘합작 7원칙’이 단독정부를 향한 입법기구 수립이라고 비판하였고, 한국민주당은 유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이 국가의 재정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재미한족연합회, 신한민족당, 건민회, 천도교청우당, 조선대중당, 한국청년회 등 많은 군소정당 사회단체는 지지를 표명하였다. 김구도 좌우합작 성립이 “8⋅15 이후 최대의 수확”이라고 지지하였으나 정당적 지지를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조선일보』, 1946. 10. 10; 정병준, 「1946-1947년 좌우합작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변화」, 『한국사론』 29, 1993, p. 290)
좌우합작운동에 이러한 지지는 이 시기에 좌우이념 대립과 미⋅소갈등이라는 냉전질서를 벗어나서 민족 스스로가 단결하여 정치적 경제적 종속을 탈피하려는 다양한 중간세력이 존재하였음을 의미했다. 이 때, 반드시 정치세력화가 되지 않았더라도 좌우합작이나 중간노선을 모색하는 지식인도 등장하였다.(방기중, 「해방정국기 중간파노선의 경제사상 : 강진국의 산업재건론과 농업개혁론을 중심으로」, 『최호진박사 강단 50주년기념논문집, 경제이론과 한국경제』, 박영사, 1993; 장규식, 「해방 정국기 중간파 지식인 오기영의 현실인식과 국가건설론」, 김용섭 교수 정년기년논총, 『한국근현대의 민족문제와 신국가건설』, 1997.)
좌우익과 구별되는 독자세력으로서 인민당이나 신민당 및 국민당은 지지세력으로 노동자, 농민, 양심적인 인텔리나 자영업자 소시민 등 이외에도 민족자본가까지 포괄하였다. 안재홍은 해방 후 한국사회가 일제의 질곡으로 지주와 자본가, 노동자, 농민 등 전 민족이 초계급적으로 굴욕과 피착취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엄정한 경제적 토대에 의한 계급대립, 분열이라는 기본조건이 소멸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초계급적 통합국가론을 주장하면서도 우익주도하의 좌익의 협동연합을 의도하였다.(안민세, 「몽양 여운형씨의 추억」, 『민성』 5-10, p. 70; 안재홍, 『한민족의 기본진로』, 조양사, 1949, pp. 59-61)
미 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가 중간정당으로 발전하기를 원해 입법의원을 설치하여 그들의 세력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군정장관의 토지개혁법안의 부결, 부일협력자법안 인준거부로, 좌우합작위원회는 해체론이 대두할 정도로 존재이유가 없어졌다.(조성훈, 「좌우합작운동과 민족자주연맹」, 『박성수교수화갑기념논총』, 1991, pp. 407-408) 미국은 중간세력의 연합정책과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한국문제의 해결이 실패하였음을 인정하고 유엔으로 이관하였다.
합작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던 세력과 그 지지세력이 독자적으로 발전할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이 되어서 정당 사회단체의 통합을 모색하고 1947년 12월,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민족자주연맹은 당시 한국사회에 중간계층의 미발달로 지지기반이 취약하였을 뿐만 아니라, 좌우익 세력으로부터 협공을 받아 세력이 약화되었다.(김광식 인터뷰, 「혁신계 변혁, 통일의 맥-유한종의 증언」, 『한국현대사의 증언』, 『역사비평』,1989 여름호, p. 328.)
한편, 반탁을 주장했던 우익진영은 한반도문제가 유엔으로 상정되자, 유엔의 감시아래 총선거가 실시되면 그들의 의사가 자유롭게 반영될 것으로 여겨서 크게 환영하였다. 그러나 총선거의 의미를 두고, 이승만과 김구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이승만은 남한만의 선거를 뜻한 반면에, 김구는 남북한 총선거를 상정하였다. 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의 주장이 현실적이라는 입장에서 그를 지지하였다.(심지연, 앞의 책, p. 64.) 이로써 반탁진영이 분열되었다.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위원단을 방문하고 남북협상 방안과 양군철병 조건 및 시일의 협정 공포 등을 제안하였고, 유엔에 대한 신뢰를 나타냈다. 2월 6일,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안을 유엔한국위원단에 제출하였다. 2월 10일, 김구는 “3천만동포에 읍소하노라”는 성명에서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미 소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지도자회담을 소집할 것이니, 이와 같은 원칙은 우리의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 못할 것이다”라고 사상을 초월한 단일민족의 정신으로 행동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이와 달리 2월 3일, 이승만은 공산당과 함께 할 수 없음을 밝히고 전 한국민은 민족자결정신을 발휘하여 가능한 지역에서의 단독선거에 협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 ‘가능지역 선거’를 결정함으로써 미소대립이 커지고 남북총선의 실현이 좌절되자,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7인은 공동성명에서, “우리 문제를 미소공위도 해결하지 못하였고, 국제연합도 해결 못할 모양이니 이제는 우리민족으로 자결하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남북협상을 구체화하였다.(『경향신문』, 1948. 4. 6; 『새한민보』 2-9, 1948 4월 하순호; 『백범김구전집』 8, p. 351.)
이에 대해서 이승만 등은 김구의 견해가 소련의 충실한 대변인이라고 비판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서울신문』, 1948. 1. 29, 1. 31; 『경향신문』, 1948. 2. 1; 『조선중앙일보』, 1948. 2. 7; 『조선일보』, 1948. 3. 5.) 1948년 2월 16일 김구와 김규식은 김두봉에게 보낸 서한에서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의사를 전달하였다.(도진순,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pp. 207-210. 그런데,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47년 10월 3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에서 남북한의 단합된 역량으로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북연석회의 구상을 밝히고,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시켰다고 주장하였다(『조선통사』 하, p. 360).)
1948년 3월 8일,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에게 남북협상에 관한 서한을 보냈고, 같은 달 15일, 김일성이 이를 수락한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북한측은 ‘전조선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를 평양에서 4월 14일 개최하자고 제의하였고, 남한지도자 15명에게 초청장을 발송했다.(「유엔결정과 남조선 단선 단정을 반대하고 조선통일적 자주 독립을 위하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개최를 제의」, 1948. 3. 25, 『북한관계사료집』 27, pp. 493-496)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 남북 지도자회담의 실현을 요구하였고, 북한에서도 이에 대한 답변을 보내 1948년 4월에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열리게 되었다.
김구와 홍명희가 4월 19일에 출발하였고, 조소앙 등은 20일, 김규식은 21일에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미 19일에 북한은 연석회의를 개막하여 김일성이 제시한 “유엔임시위원단을 몰아내고 유엔총회와 소총회 결정의 무효화, 단정단선반대, 소미 양군의 즉시 동시철퇴의 실현, 양군 철퇴 후 조선인민의 자주성 위에서 선거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 등을 논의하였다.(『동아일보』, 1948. 4. 21; 김월송, 「개회사」, 『북한관계사료집』 VI, pp. 9-10.)
이어서 4월 30일,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과 김두봉과의 요인회담을 통해서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남북조선제정당 사회단체 공동성명서」, 『북한관계사료집』 6, pp. 61-63.) 서울에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의 성과를 자주적 민주적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남한 단선단정(單選單政)을 반대하며 미⋅소 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데 일치하였다고 평가하였다.(『서울신문』, 1948. 5. 6; 「평양으로부터 환경후 양김선생공동성명」, 1948. 5. 6, 엄항섭편, 앞의 책, p. 43; 「남북회담의 성과에 대하여」, 1948. 5. 10, 삼균학회편, 『소앙선생문집』 하, 1979, pp. 106-107.)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한 이유처럼 미⋅소 양국간의 냉전은 한국인의 자결에 의한 통일독립의 꿈은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강재륜, 「남북한 통일대화정책의 역사적 조망」, 이상우편, 『통일한국의 모색』, 박영사, 1987, p. 195.) 이미 국제화된 한국 문제를 미국과 소련의 합의없이 남북한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