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핍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여 왔던 독립운동 세력들은 ‘중경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어느 단체도 연합국으로부터 승인을 얻지 못했고 효과적인 지원도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중경 임시정부’는 해방 후에도 정부자격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독립운동 세력은 통합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자본주의사회와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려는 근본적인 이념적 차이로 인해 단일한 통합조직을 이루지 못한 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은 김구의 표현처럼 기쁜 소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한탄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던 독립군이 조국탈환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채,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 측의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 속에 빠져있을 겨를이 없었다. 당장에 36년간의 식민지 억압체제가 무너져 버린 상황이 초래한 혼란을 극복해야 했다.
해방의 흥분 속에서도 국내 정치세력 가운데 여운형(呂運亨)이 조선총독 아베의 요청에 의해 일본인의 생명보호를 조건으로 연합군의 진주까지 치안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 등 당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엔도(遠藤陸作) 정무총감으로부터 권한을 받았다. 당시 일제하 국외에서 활동하였던 독립운동세력은 한반도 내에 기반이 없었고 귀국이 지연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여운형은 일제말에 조직한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방과 동시에 자생적으로 조직된 치안위원회, 자치위원회, 치안대, 보안대 등 각종 단체들을 규합하여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결성하였다.
1945년 8월말에 건국준비위원회는 이미 도 단위에 전부 지부가 결성되었고, 군 단위를 비롯하여 일부 면 단위까지 설치되어 그 지부의 수가 145개에 이르렀다.(『매일신보』, 1945. 9. 4)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과도기적으로 치안질서를 유지하고, ‘사실상의 정부기구’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해외로부터 지도자들이 돌아오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그 활동은 어디까지나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현대일보』, 1946. 8. 2; 심지연, 『인민당연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1991, pp. 14-15; 심지연, 「1945-48 남한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연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론』 27, 1997, pp. 55-57.) 건국준비위원회가 점차 ‘조선공산당’ 세력이 주도하게 되자, 안재홍(安在鴻)은 ‘중경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탈퇴하였다.
미군 진주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아서 9월 6일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서둘러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으로 개편하는 동시에 인민위원 55명을 선출하고, 9월 14일 내각을 조직했다. 이는 미군이 입성한 후 ‘인민공화국’을 기정사실로 인정받아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맞추어 지방에서도 행정기관의 성격을 띤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이기하 외, 『한국의 정당』, 한국일보사, 1987, p. 33.)
이들과 대립적 입장을 띠고 있던 송진우(宋鎭禹), 김성수(金性洙) 등 보수 우익 세력은 ‘건국준비위원회’가 좌파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참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경 임시정부’의 귀환만을 기다리면서 아무런 역할도 해내지 못하다가 미군이 진주하는 날 비로소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당하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의 타도를 외쳤다. 한국민주당은 648명의 발기인을 내세워서 결성한 후 서울에 5천 명, 지방에 5만 명의 지지세력이 있다고 주장하였다.(『서울신문』, 1945. 12. 12; 심지연, 「보수당의 뿌리, 한민당의 공과」, 이기하 외, 앞의 책, p. 146; 서중석, 『한국근현대 민족운동연구』, 역사비평사, 1991, pp. 290-292.)
당시 난립되어 있던 정당들은 통합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국민들은 각 정치세력의 통합을 위해서 국외지도자로서 명망이 있었던 이승만의 귀국과 ‘중경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대하였다.
1945년 10월 5일, 각 정당의 통합운동의 일환으로 양근환(梁槿煥)의 중재 아래 ‘각 정당 수뇌간담회’가 열렸다. 10월 10일에는 건국동맹, 한국민주당, 국민당 등 32개 단체대표 50여 명이 ‘각 정당 긴급문제 공동토론회’를 개최하여 38선 문제, 일본인 재산처리문제 등을 논의하고 상설기관으로 ‘각 정당 행동통일위원회’를 조직했다.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자 각종 우익 사회단체들은 이승만의 지도 아래 통합한다는 명분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이 협의회는 처음에 ‘조선공산당’을 비롯하여 한국민주당, 국민당 등 주요 정당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대한 취임을 거부하고 공산당에 대한 비난을 하면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보수진영 연합체로 한정되었다가 이승만 지지세력으로 변하였다.(장원정, 「1945-46년 경상남도 우익세력에 관한 고찰」, 『해방 후 정치세력과 지배구조』, 문학과 지성사, 1995, p. 59) 협의회는 이승만의 지방순회를 계기로 지방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945년 11월 23일,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등 15명이 먼저 돌아오고, 12월 2일, 외무부장 조소앙, 의정원장 홍진 등이 귀국했다. ‘임시정부’는 귀환을 위해 중국과 미국의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미 군정이 개인자격으로 입국을 요구했기 때문에 더욱 늦어졌다. 김구는 중국전구 미군사령관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에게 “어떠한 공적 위치로서가 아닌 완전히 개인 자격으로서 귀국을 허락받았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제출했다.(정병준, 「남한진주를 전후한 주한미군의 대한정보와 초기 점령정책의 수립」, 『사학연구』 51, 1996, pp. 170-174 ; 한시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 국민대한국학연구소, 『해방후 해외 한인의 귀환문제연구』, 2003. 5, pp. 178-188)

임시정부 요인의 환국을 환영하는 시민들(1945. 12)
귀국한 김구가 통합운동을 전개하였지만 국제적 합의에 의해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 군정 이외는 여하한 정부라도 인정하지 않는 미 군정의 발표로 ‘중경임시정부’는 개인의 자격만을 갖게 되었다. 비록 개인자격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들의 귀국으로, ‘중경 임시정부’는 정치세력의 통일운동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허헌 등이 김구와 김규식을 방문하고 ‘인민공화국’의 중앙위원의 취임을 요청하였으나 김구와 김규식은 이를 거부하고 ‘중경 임시정부’ 주도론을 내세웠다.
이에 따라 정치세력들은 ‘중경 임시정부’와 ‘조선인민공화국’의 지지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조선공산당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지지하였고, 한국민주당이 ‘임시정부 봉대론’을 내세웠다. 인민당의 여운형은 ‘중경 임시정부’를 조선독립동맹과 같이 하나의 독립운동단체로 인식하여 배타성을 띤 법통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국내의 정치세력을 규합한 후 과도적 건국준비 조직을 결성하여 해외의 혁명세력을 포용해서 거국일치의 과도정권을 세우려 하였다.(정병준, 『몽양 여운형평전』, 한울, 1995, pp. 114-115.)
이상과 같이 국내 정치세력들은 모두 통일된 단일정부의 수립을 바랬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대립했다. 그들이 서로 대립한 이유는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데에 있었다.(심지연, 「해방의 의미와 해방정국의 전개」, 韓國政治學會 編, 『韓國現代政治史』 (法文社, 1995. 8), pp. 38-42) 우리 민족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점령한 사실이 남북분단의 결정적인 근거였지만, 또한 해방 후 모든 정치세력이 완전한 자주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함께 노력할 좋은 기회였으나, 통일된 운동노선을 형성하지 못한 점도 지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