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부는 신생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여 민주주의 발전, 민생안정, 경제건설 등과 남북통일의 과제가 부과되었다. 그러나 남한 내 좌익이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북한이 38선 충돌을 야기하면서 남으로 게릴라를 파견하는 등 남한사회의 불안을 조성하였다. 여기에 정부수립과정에서 이승만을 지지했던 한국민주당과 갈등을 빚었고, 남북협상파 세력들의 움직임도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초래했다.

총선거 후부터 이승만과 한국민주당 세력은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켰다. 한국민주당은 내각제를 채택해 이승만을 상징적인 대통령으로 하고, 국무총리를 내세워 실권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의 반대로 대통령제 헌법이 채택되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후 초대 내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한국민주당의 기대를 배제한 채 독자적인 내각을 출범시킴으로써 또 한번 대립하였다. 이 때문에 국회에서 이승만이 추천한 국무총리로 이윤영을 인준하지 않고, 그 대신 이범석을 인준했다.

제헌국회의 정파별 의원구성에서 이승만 계열인 독립촉성국민회는 55명에 불과하여 정당정치에 기초한 정치의 안정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승만을 따르는 국민회 소속 50여 명이 구성한 이정회(以正會)가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으로 이어졌다. 이에 맞서 1949년 1월 26일, 한국민주당은 이승만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한국독립당 계열이었던 신익희 세력과 대한청년단 세력 등을 규합하여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을 창당하였다. 1950년 1월, 민주국민당은 내각제 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여 이승만 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최한수, 『한국정당정치변동』, 세명서관, 1999, pp. 56-58)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고 김구가 암살되면서 중도세력들은 약화되어 갔으나 남한에서 그들의 이념적 지향은 제헌국회 내 소장파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무소속의원 85명 가운데 소장파 집단은 의회 내에서 진보적 혹은 급진적 성향을 띠었다. 민주국민당이 결성되자, 한국독립당계를 중심으로 한 동인회(同仁會)와 진보적 색채의 성인회(成仁會)는 동성회(同成會)로 통합하였다.(박태균, 『조봉암연구』, 창작과 비평사, 1995, pp. 154-155;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선인, 2003, pp. 125-126) 이들은 각종 법안 처리과정에서 주요 자원의 국유화, 무역과 주요 공장의 국가관리, 부의 집중방지, 분배정의 등을 강조함으로써 반독점자본의 입장을 표현하였다. 국가보안법의 제정을 반대하였고,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김구⋅김규식의 노선을 대변하면서 보수세력의 반공주의적 통일관에서 벗어나 미군철수와 남북협상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였다.(백운선, 「이승만 정권 초기 성격과 제헌국회소장파」 , 『구범모 교수 화갑기념논총, 전환기 한국 정치학의 새지평』, 나남출판, 1994, p. 466, pp. 468-472)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분위기가 잘 드러났다. 이 선거는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국회의원 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첫 의원선거로 2년간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라는 점과 냉전의 제1선인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실시된다는 극적인 증거를 보인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서울신문』, 1950. 5. 21.)또한, 새로 선출되는 국회의원은 1952년에 실시될 제2대 대통령을 뽑는 중대한 의무가 있었다. 당시 제헌국회의 임기가 끝날 즈음, 선거에서 승산이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선거연기를 원했으나 미국측의 압력으로 선거를 예정대로 실시했다. 선거 방식은 소선거구제로 국민이 직접 선거에 참가해 선거구별로 최다수 득표자 1인을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직접선거 방식을 채택하였다. 의원 정수는 제헌국회 때보다 10명이 늘어난 210명이었다.

총유권자 수는 843만 4,737명으로 이 가운데 775만 2,076명이 투표에 참가해 91.9%의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공산당을 제외하고, 제헌 국회의원선거에 참가하지 않았던 남북협상파와 중도 계열이 선거에 참가해 평균 10.5 대 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하였다. 특히, 5⋅10선거를 반대하던 중도세력들의 출마는 이들이 남한정부를 지지한 것으로 이해되었다.(『한성일보』, 1950. 6. 3) 아래 표에서 보듯이, 대한국민당 후보가 165명, 민주국민당 154명, 국민회 113명, 대한청년단 60명 등 39개 정당⋅단체와 1,513명에 이르는 무소속 후보들이 출마하였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정당 사회단체 입후보 현황

 

선거는 1948년 선거보다 더 자유로운 선거분위기 속에서 실시되었다.(무쵸 주한미국대사, 「미 국무부장관에게 5⋅30 총선거 진행상황을 보고」, FRUS 1950. 5. 27, pp. 89-92) 선거 결과, “서울시 개표 결과, 1명 이외는 모두가 신인”이라는(『서울신문』, 1950. 6. 1-2.) 기사 제목이 시사한 것처럼 무소속이 총 정원의 60%인 126석이나 당선되어 두드러진 강세를 보였고, 민주국민당과 대한국민당이 각각 24석(11.4%), 국민회가 14석(6.6%), 대한청년당이 10석(4.76%), 대한노동총연맹과 일민구락부가 각각 3석, 사회당이 2석, 민족자주연맹이 1석, 기타가 3석을 차지하였다. 입후보자와 당선자의 비율을 보면, 무소속은 1,513명이 출마해서 126명이 당선되었고, 대한국민당은 165명이 출마하여 24명 당선되었으며, 민주국민당은 154명이 입후보해서 24명이 당선되었다.

이를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안정을 가늠할 수 있게 여야를 구분하면, 여당적 입장인 대한국민당 24석, 국민회 12명, 대한청년단 1명 등 총 57명에 그쳤고, 나머지는 야당 세력인 민주국민당 24석, 사회당 2석, 민족자주연맹 1석 등 총 27석이었고, 그 외 2/3정도가 무소속이었다.(이기하, 『한국정당사』, p. 213.) 한국민주당이나 제헌의원들이 다수 낙선되고 무소속이나 중간파에서 다수 당선되었다. 서울 시민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키던 성북구에서는 조소앙이 3만 4,035표를 획득하여 조병옥의 1만 3,498표에 비해 큰 표 차이로 당선되었고, 원세훈․장건상 등이 ‘뜻밖에 다수표’로 당선되었다.(『연합신문』, 1950. 6. 1; 『한성일보』, 1950. 6. 3.)

당선자의 분포는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총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고 강조되었다. 그러나, 민주국민당이 크게 패배하였다. 5⋅10선거에서 민주국민당의 전신인 한국민주당은 입후보자 90명 중 29명이 당선되었지만, 무소속까지 포함하여 60여 명에 이르러 원내에서도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5⋅30 선거에서 민주국민당의 명의로 당선된 의원과 무소속 중에서 민주국민당으로 지목되는 인물을 포함하더라도 40여 명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민주국민당의 주요 인사이며 구 한국민주당 계열인 백남훈⋅조병옥⋅김준연⋅함상훈 등이 낙선하였다.(『국도신문』, 1950. 6. 4 ; 김일영, 「전쟁과 정치」 , 유영익⋅이채진 편, 『한국전쟁과 6⋅25전쟁』, 2002, pp. 10-12)

선거 결과, 중간파의 진출이 두드러진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중간파 당선자는 10명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이임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관한 연구」, 『성대사림』 10, 1995, pp. 67-68; 김일영, 「전쟁과 정치」, pp. 7-8) 다만, 이들 중간파들은 남북협상이 남북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 자들로 지지를 많이 획득하고 있었으므로,(『자유신문』, 1950. 6. 2.) 특히 남북관계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5⋅30선거에서 자신이 졌다는 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지만(로버트 T. 올리버(박일영역),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pp. 393-394) 우파세력이나 이승만의 패배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승만 지지세력과 민주국민당 사이의 양자대립구도가 다정파 대립구도로 전환되어 정치적 불안정이 확대 재생산되었다.(정영국, 「정치지형의 변화와 5⋅30선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3, 오름, 1998. p. 197.)

한편, 해방 후 일제시대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 처벌 문제는 농지개혁과 함께 건국 이후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의 하나였다. 이는 단순히 친일파 개개인의 처벌 문제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형성된 식민지 잔재를 함께 청산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꼭 필요한 과제였다.(안진, 「해방후 친일파 처벌에 관한 연구」, 『사회과학연구』 14-2, 1996, p. 167; 이강수, 『반민특위연구』, 나남출판, 2003, pp. 15-16.)

일제의 질곡에서 해방된 거의 모든 국민들은 친일파의 숙청을 원하였다. 각 정치세력은 친일파 처리를 표방했으나, 그 범위와 방법에서 차이를 드러냈다. 1945년 9월 3일, 중경 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발표한 당면정책에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賣國賊)에 대하여는 공개적으로 엄중히 처단할 것”을 주장하여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좌익세력의 결집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친일파의 공민권박탈을 물론 민족반역자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그들의 물적 기반을 박탈할 것으로 주장했다.(안진, 앞의 논문, pp. 169-170)

이에 대해서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국권 회복을 우선한 후, 즉 정부 수립 후에 처리하자는 입장이었다.(『서울신문』, 1946. 11. 12; 『동아일보』, 1947. 7. 12) 미 군정은 친일파를 처벌하라는 여론을 무시하면서 그들을 등용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은 미 군정을 불신하게 한 요소가 되었다.

미 군정시기에 친일파 청산을 위한 노력이 구체화된 것은 과도입법의원의 노력으로 나타났다. 일부 친일파 의원이 당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우합작위원회 출신 의원들을 중심으로 1947년 7월 2일 제102차 본회의에서 전문 12조로 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다.(『서울신문』, 1947. 7. 4.) 그러나 제177차 입법의원 본회의에서 군정장관 대리 헬믹(G. C. Helmick)은 ‘부일협력자등의 법안’을 인준한다면 불가피한 경우로 부일한 현존의 우수한 관리가 제거되므로 인준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동아일보』, 1947. 11. 30.) 군정장관이 인준을 해야 비로소 효력이 발생할 수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공포를 하지 않았다.

이로써 정부수립 후, 미 군정기간 해결하지 못한 반민족행위자 처벌문제가 재론되었다. 1948년 8월 5일 제40차 국회 본회의에서 헌법 제101조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서기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에 의거해 ‘반민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을 긴급동의로 제안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좌익이 도전하는 건국 초기 남북분단 상황이므로 반민족행위자의 처리 시기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그는 이 문제 보다 먼저 정권을 회복하여 정부의 권위가 내외에 확립되도록 가장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조선일보』, 1948. 9. 4.)

그러나, 국회에서는 1948년 9월 7일 제59차 본 회의에서 특별법안을 재석 141인 중 찬성 103, 반대 6이라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군정시기 입법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기초로 만든 것으로 전문 3장 32조로 이루어졌다. 법안의 내용은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는 최고 무기징역 최하 5년 이상의 징역,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징역,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 등이었다.

특별법안이 공포되자, 반민족행위자의 구체적인 친일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김인식 의원 외 19인의 긴급동의로 곧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구성하였다. 국회 제113차 본회의에서는 반민특위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반민족행위특별조사기관 조직법안’, ‘반민족행위특별재판부 부속기관 조직 법안’ 등을 모두 통과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국회에서는 특별재판부 재판관과 검사관 및 반민특위 도(道)조사부 책임자를 선출함으로써 민족반역자 및 부일협력자에 대한 처리기구를 완성하였다. 특별조사위원장 김상덕(金尙德) 의원, 특별재판부장 김병로(金炳魯), 특별검찰부장 권승렬(權承烈) 등을 비롯해 경기도 이기룡(李起龍), 충청남도 윤세중(尹世中) 등 각도 조사책임자를 임명하고, 40명의 특경대를 조직했다.(허종, 앞의 책, pp. 151-193.)

1949년 1월 5일, ‘반민특위’는 중앙청 205호실에 사무실을 열었다. 같은 달 8일, 최초로 화신재벌 박흥식을 체포하는 것을 시작으로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을 체포하였다. 또한 노덕술, 김태석, 김덕기 등 일제하의 경찰, 헌병 등과 뒤이어 전 대동신문 사장, 대한일보 명예사장이었고 한국방공단장인 이종형이 체포되었다. 이종형은 1948년 10월 서울운동장에서 반공대회를 열었을 때󰡐반민법은 망민법(亡民法)’이라고 주장한 반민법 반대의 대표자였다.(『조선일보』, 1949. 1. 12.)

당시 여론은 “반민자 처단의 역사적인 사업은 진정 3천만의 부르짖음에 호응하였고 민족정기는 푸른 산맥처럼 줄기차게 소생하였다”고 반겼다.(「反民特委의 총결산」, 『주간 서울』, 1949. 9. 26) 그러나 친일파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이미 국회에서 처벌법이 거론되자, 친일파들은 반민법을 ‘망국법’이라고 주장하고, 이 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하는 국회의원들이 ‘공산당의 주구’이며 “민족을 분열시키는 반민법을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특별법이 통과된 후 친일세력들은 법의 시행을 반대하기 위해 ‘친일세력 처단 반대’가 아닌 ‘반공구국총궐기대회’를 열었다.(송건호, 『분단과 민족』, 지식산업사, 1986, p. 200)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 경찰간부들이 체포될 단계에 이르자, 1949년 6월 6일 경찰을 동원해 ‘반민특위’ 사무소를 포위하고 특별위원회 소속 특경대를 강제해산시켰다. 경찰당국에 무장해제를 당한 특경대의 활동은 실질적으로 약체화되었다. 더욱이,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되고, 친일파 척결의 주도세력이었던 소장파의원들이 간첩혐의로 체포됨으로써 ‘반민특위’는 크게 위축되었다.

1949년 7월 6일, 국회에서는 곽상훈 의원 등이 1950년 6월 20일까지였던 ‘반민법’의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0일로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재석의원 136명, 찬성 74표, 반대 9표로 통과시켰다.(『경향신문』, 1949. 7. 6) 그 결과, 해당자의 체포와 공소를 위한 ‘반민특위’의 활동은 8월 31일로 그 종지부를 찍었다.(「반민특위의 총결산」, 『주간 서울』, 1949. 9. 26) 1949년 9월 5일, 위원장 김상덕 이하 전원이 사퇴함으로써 특별위원회는 공식적인 활동을 중지하였다.

‘반민특위’가 다룬 반민족 행위자 682명(남 676, 여 6) 가운데 408건에 대해 영장을 발부하였고 305명을 체포하였다. 그중 221건을 기소하여 이 가운데 재판을 받은 사람은 41명이었으며,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사형 1명, 무기 1명, 2년 6개월 1명, 1년 6개월 1명, 1년 3명 등 7명에 그치고 말았다. 사형 선고를 받았던 이덕기도 전쟁 전에 석방되었고, 나머지도 자격정지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재감자수는 56건이고 보석된 자는 64건이었다. 그 결과 친일파 청산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의 활동은 실패하였다. 미 군정기 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로 추산한 규모에 비추어 보면(『경향신문』, 1947. 3. 19; 이강수, 앞의 책, p. 76)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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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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