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 제25군 예하에는 10기계화사단이 있었다. 이 사단은 평양 사동(寺洞)에 주둔하면서 북한군 기갑부대 창설의 모체 역할을 하였다. 1947년 5월경 소련군 제10기계화사단은 북한군 전차 승무원의 훈련을 위해 북한군 각 부대에서 선발된 요원 400명을 소집하였다.

북한군의 전차부대의 창설은 북한군의 건설과 병행하여 진행되었다. 평양에 배치된 소련 제10기계화사단에 전차장, 운전병, 포장, 기술병 등과 자주포 분야 및 전차 전문군관 등의 전문분야에 따라 전차병 양성을 위한 3개월 교육과정이 개설되었다. 이들은 장차 북한에 창설될 전차부대의 기간요원으로써 3개월 훈련을 수료하였고 이 병력을 근간으로 1947년 12월 북한군 최초의 전차부대인 제203독립교육전차연대를 창설하였다.

북한군은 1947년 말부터 각 지방당과의 연락 하에 주요도시 고급중학교에 체육교원 명목으로 전차 기술병을 위장 침투시켜 유능하고 체격이 좋은 재학생들을 선발했다. 이 학생은 전차운전, 포 조종, 수리, 지휘, 통신 등 전 분야에 걸친 특수교육을 실시하였다. 1948년 5월에는 제203교육전차연대에서 최초의 교육생들이 배출되어 전차부대 창설에 투입되었다. 제203연대는 전차부대 병력뿐만 아니라 각 보병사단을 위한 6개 자주포대대 병력과 차량화연대 운전병들도 배출하였다.

이때 잔류한 소련 전차연대는 150대의 T-34전차97)와 300여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한인 2세인 뾰돌(최표덕 : 崔表德) 중좌가 지휘하고 있었고, 동 연대내에 는 약 70명의 통역관(모스크바 동양대학 조선어과 출신)을 배치하고 있었다. 소련군 전차연대장 뾰돌 중좌는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 및 동만주, 대일전에도 참가하여 소련정부에서 전투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후에 북한군으로 편입되어 소장까지 승급된 인물이었다.

한편 북한군은 1949년부터 전차부대를 대대적으로 확장하였다. 1948년 12월 3일 뾰돌 전차연대가 군사고문관 15명을 잔류하고 마지막으로 철수할 때 T-34전차 60대, 76㎜ 자주포 30대, 사이드카(모터찌크) 60대, 차량 40대를 북한군 제105전차대대로 인계하였다. 이 장비를 인수한 북한군 제105전차대대는 제115전차연대로 증편 및 개편된다. 이때 연대는 2개 전차대대와 1개 자주포대대를 중심으로 하여 공병, 통신, 수리중대와 군의소(軍醫所)가 편성되어 있었다.

1948년 12월 25일 모스크바 전략회의에 따라 소련 특별 군사사절단이 입북하여 전차부대의 창설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 사절단의 대부분이 기갑전술의 권위자들로 남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전에서 기갑부대의 활약에 의한 전과가 컸었기 때문에 지상군에 있어 기갑의 비중을 중시하고 있었다. 1949년 1월 평양에 도착한 소련군 사절단 40여명은 대부분이 기갑분야 전문가였다. 스티코프 대장을 수반으로 하는 사절단은 장군 5명, 대령 12명, 중령~대위급 2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장군 5명 중 자하로프를 제외한 나머지는 카투노프와 쿠바노프(Kubanov) 등은 모두 기갑전문가였다.

1949년 5월 초순에는 군관강습소 졸업생을 대량으로 임관시키는 한편 전차연대를 북한군 제105전차여단으로 개편하여 유경수(柳京洙)를 소장으로 승진시켜 여단장에 보임하였다. 교육연대 교육생들을 바탕으로 3개 전차연대로 편성된 제105전차여단, 1개 차량화연대 및 수색대대(모터사이클) 등이 창설되었다.

 

북한군 전차여단 편성

 

전차반입과 장비문제는 쿠바노프가 지휘하고 연료문제는 크리크프와 코트레프가 담당하였다. 소련 군사사절단은 북한군 기갑부대를 무력 남침의 주력부대로 육성하고 전차부대를 비롯하여 자주포 싸이드카, 자동차, 수송부대와 해군선박, 그리고 공군에 이르기까지 전군의 원활한 기동을 위하여 소요되는 연료문제 해결을 서둘렀다.

그러나 북한에 도착한 이들은 한국 지형을 분석하여 산악과 하천이 많아 전차부대 운영이 부적합하며, 또 한국군의 대전차 장비가 빈약하므로 구태여 많은 전차를 보유할 필요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최초 계획했던 전차 500대를 그 반으로 감소하여 지원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소련군 철수시 인수한 장비로 편성된 전차연대(2개 전차대대+1개 자주포대대)는 부대를 더 확장하기 위하여 동 연대내에 군관 및 전사강습소를 개설하여 전차병 및 전차군관을 대량 양성하여 1949년 5월초에 졸업시키는 한편, 1945년 말 현대전의 기술훈련을 습득하기 위해서 소련으로 유학 보낸 약 1,000명의 인원이 3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귀국하자 이들을 전차연대의 기간요원으로 배치하였다.

소련군으로부터 추가적인 전차를 지원 받아 1949년 5월 16일에 전차연대를 북한군 제105전차여단으로 증편하게 되어 3개의 전차연대, 1개의 기동화연대, 1개의 자주포대대를 주축으로 편성하고, 120대의 전차와 병력 6,000명을 갖는 여단으로 증편하였다.

 

소련제 T-34 탱크로 무장한 북한군

 

여단의 편성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T-34전차 40대씩을 보유하는 3개 전차연대(제107, 제109, 제203연대)와 2,500명의 병력과 차량으로 구성되는 제603차량화연대, 76.2㎜ 자주포(SU-76) 64대로 구성되는 자주포대대, 200대의 모터싸이클로 구성되는 모터사이클대대, 통신대대, 공병대대, 운수대대(수송대대), 그리고 전차 수리소와 군의소가 추가적으로 창설되어 배속되었다.103) 북한군 제105전차여단은 예하부대도 아래와 같이 배치하였다.

여단본부 및 직할대대 : 평양 사동
제107전차연대 : 평양 사동
제109전차연대 : 황해도 남천
제203전차연대 : 강원도 철원
제603차량화연대 : 평양 사동

제105전차여단의 편제상 전차 대수는 120대로 1개 전차중대 편제상 4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고, 1개 전차대대는 3개 전차중대로 편성되어 있으므로 3개 중대 전차 12대(3개 중대×4대)와 대대장 전차 1대로 총 13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1개 전차연대는 3개 전차대대로 편성되어 있으므로 3개 대대 전차 39대(3개 대대×13대)와 연대장 전차 1대로 총 4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전차여단은 3개 전차연대로 편성되어 있으므로 3개 연대의 전차 총 대수는 120대(3개 연대×40대)가 된다. 여기에 더하여 새로 편성된 제208교도연대는 전차교육연대로 잔여 30대의 전차를 교육용으로 보유하고 있었고, 또 이 교도연대는 새로운 전차부대 창설의 모체가 되었다.

북한군 모터 싸이클 정찰대

제105전차여단은 날로 병력과 장비가 증강되어 1949년 8월초까지는 모터찌크 300대, 트럭 200여대, 지프차 100여대가 새로 소련에서 반입 증강되었고 동월 말에는 여단직속 교도연대가 신설되어 각 사단에서 고급중학 중퇴이상 건강한 자들을 차출하여 훈련시켜 동 여단에 배치하였다.

동 여단은 1949년 10월에 동 여단 주력부대인 제109전차연대가 황해도 남천 38선 접경으로 이동 배치되었고 제203연대는 강원도 철원에 주둔하게 되었다. 평양 사동에는 여단본부와 주력부대인 제107연대와 제208교도연대만이 남게 되었고 제105전차여단은 1949년 8월 이후 학술적인 실내교육을 대폭 줄이고 주로 야전에서 전술훈련에 치중하였다. 1949년 10월 하순 북한 민족보위성에서 실시한 전군 대기동 작전훈련에서 동 여단이 가장 우수하다는 표창을 받았고 전투부대로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북한군 장갑차 싸마호트

 

1950년 4월말에 소련에서 장비가 청진항을 통해 도입되었다. 즉, 중형전차 100대, 싸마호트 60대, 트럭 150대 그리고 각종탄약, 부속품, 유류 등이며 동시에 병력보충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1950년 4월말까지 제105전차여단은 8,800명의 병력과 T-34형 전차 258대, 싸마호트 154대, 모터찌크 560대, 트럭 380대등의 막강한 병력과 장비로 증원되었다. 이 무렵인 동년 5월 장갑차량 및 모터사이클 등으로 장비된 제603경기계화(모터사이클) 연대가 창설되었다.

소련제 SU-76 자주포

 

그리하여 1950년 6월 초 나남에서 T-34전차 30대로 독립전차연대를 창설하였고, 이후 약 90여대의 전차로 제16 · 제17전차여단 등 2개 여단을 추가로 창설하게 된다. 1950년 6월 6일 철원에서 제16전차여단의 편성이 시작되었다. 이 여단은 각각 21대의 T-34를 보유한 2개 전차대대, 각각 450명의 병력을 보유한 2개 차량화 저격대대, SU-76 8문을 보유한 1개 포병대대, 76㎜ 대전차포중대, 자동소총중대, 공병중대, 통신중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전차 여단의 병력충원은 전차병은 제204교육전차연대에서, 차량화저격병은 징병자들로부터, 포병 및 박격포병은 23일에서 30일간 교육을 수행하는 교육연대에서 각각 충원되었다. 제16전차여단에는 T-34 전차 44대가 동년 6월 16일에 지급되고 7월 28일까지 단계적으로 조직되었다.

T-34전차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소련 육군의 표준 중형 전차로 그 제원은, 중장갑 철판으로 보호된 중량 32톤(완전 탑재시 35톤)이며, 85㎜ 전차포 이외에 7.62㎜기관총 2정이 장착, 전차포탄은 55발을 탑재, 전차 엔진 출력은 디젤기관 493마력, 속도는 시간당 30~40마일, 전차승무원 탑승은 5명 등이다. 이 T-34전차에 대해서 당시 한국군이 장비하고 있었던 대전차화기인 57㎜ 무반동총과 2.36˝로켓포로 이 전차의 전면을 명중시켜도 파괴되지 않았다.

북한 기갑부대 운용은 소련군 개념을 모방하였다. 이에 한반도의 지형여건, 기갑여단의 규모, 소련군의 보전협동 전술개념 등을 고려하여 보병사단의 지원개념으로 사단에 배속 운용되었다. 그러나 이 여단은 소련군 편성에 비하여 50%이하의 수준이었고, 중전차연대, 박격포연대, 대공포연대, 로켓발사연대가 없는 상황이었다. 전쟁개시 전까지 북한은 T-34전차 총 258대를 비롯하여 자주포 142대, 모터찌크 560대, 트럭 380대의 기동화 장비를 보유하게 되어 제105전차여단에 추가하여 새로운 전차부대를 창설할 능력을 보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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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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