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제25군사령관 치스챠코프는 1945년 8월 24일 함흥으로 들어가면서 조선인민에게 낸 포고문에서 “당신들 수중에 행복이 있다”고 해방을 선언하면서도, 38선 분할에 관하여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평양에 입성한 후, 평남 인민정치위원회 회의에서 최초로 “38도선이 소⋅미양군의 진주의 경계로만 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의미는 없다”고 해명하였다. 이것이 북한에서 38도선에 대하여 최초로 나온 성명이었다.155) 소련 점령군은 계속하여 26-28일 경에는 해주⋅신막⋅복계⋅김화⋅화천⋅양양까지 전개하여 38도선 이북 전 지역을 점령하였다.
동년 8월 24일 전후로 평양 함흥에 소련군이 투입되면서 제25군 부대들은 메레츠코프의 명령을 받아 38도선 부근으로 접근하였다. 8월 24일 함흥으로 비래(飛來)하였던 치스챠코프는 8월 25일 메레츠코프와 함께 군참모부를 평양으로 옮기기로 결정했고 치스차코프는 다음날 평양으로 날아갔다. 치스챠코프는 메레츠코프의 동의를 얻은 후 “미군이 아직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25군에게 38선을 넘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도록 명령하였다.
정치문제를 담당할 군사회의의 필요를 절감하여, 연길에 위치한 제25군사령부에 레베데프를 수석으로 하는 군사회의 위원들을 평양에 데려오도록 하였다. 8월 28일 25군 군사회의 위원인 레베데프를 비롯한 일단의 장교들이 평양에 도착하였다. 군사위원은 정치장교로서 소련 명령체계상 전투 지휘체계의 명령을 받지 않고 군내 당 조직 군사회의 지휘체계의 상급자의 명령을 받는다.
그러므로 레베데프는 치스챠코프의 명령이 아니라 스티코프의 명령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군사 외적인 문제, 즉 정치적인 문제의 점령작업에 착수하여 북한지역의 공업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공병사령관 니콜라이예프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창설하였다. 치스챠코프는 메레츠코프에게 보고하여 민간문제를 처리할 사령부내 “소비에트민정사령부”라는 특별기관을 설치하였다. 그 책임자는 제25군의 군사위원인 로마넨코 소장이 맡았으며 제25군 부사령관을 겸임하였다. 그리하여 그와 함께 여러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대거 도착하였다.
따라서 소련군의 행로는 최초에는 전투부대가 들어왔고 두 번째는 군사위원들이 왔으며 세 번째는 각 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그리고 뒤이어 이들을 받쳐줄 소련 한인집단이 들어왔다. 소비에트 민정은 명백히 소련 제25군 산하의 점령정책을 담당하는 집행기구였다. 직접적인 명령은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회의 군사위원 스티코프의 통제를 받는 군사조직이다. 민정이라는 명칭은 비군사적인 문제 즉, 정치적 민간 문제를 다룬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미군정이 제24군단사령부산하의 직접적인 점령 담당기구였던 것과 같은 것이다.
제25군은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소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북한 전역에 걸친 군정체계를 수립하였으며, 군정실시 기관으로 로마넨코156) 소장이 사령관인 민정관리총국을 설치하였다. 이 기관은 정치⋅경제⋅교육문화⋅보건위생⋅출판보도 ⋅ 사법지도부 등 군정에 필요한 9개의 지도부를 갖추고 군사회의(정치사령부)의 별도 통제를 받았다. 소련군 민정부(民政府)는 제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와 연해주군관구 정치위원 스티코프 상장의 지도 하에 로마넨코 소장이 지휘했고 지방에서는 각 도의 고문(소련군 정치위원)과 도 위수사령부의 협조로 활동했다.157)
이 때 소련 제25군의 지휘계통은 치스차코프 사령관이 참모장 켄코부스키 중장으로 하여금 전반적인 북한 점령군 업무를 관장케 하고, 특히 점령에 수반되는 정치적 문제는 제25군의 군사회의 정치위원인 레베데프(Nikolai. G. Lebedev) 소장이 담당하여 처리하고 있었다. 당시 제25군사령부 지휘부는 아래 표와 같이 구성되었다.

제25군사령부 지휘부
소련군대는 민주진영의 군대와는 달리 이원적 조직이기 때문에 레베데프 소장은 정치문제에 관한한 제25군의 상급부대인 제1극동전선군의 군사회의 정치위원인 스티코프 상장(후에 대장 진급)의 지시를 받아 소련군의 북한 점령 정책을 시행하였다.158)
스티코프 장군은 북한을 공산화, 소비에트화 하는 점령 정책의 입안자이며 감독자일 뿐만 아니라, 한국의 신탁통치 준비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의 소련측 수석대표역을 맡았다. 그는 1941년 독⋅소전쟁시는 북서부(레닌그라드)전선군, 서부방명군, 남서부(볼프)전선군 등의 대부대의 구사회의 정치위원으로 활약했었고, 1945년 6월에는 대일전을 준비 중인 제1극동전선군의 군사회의 정치위원이 되었으며, 1945년 9월 3일 제1극동전선군이 ‘연해주군관구’로 전환될 때 역시 연해주군관구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는 후루시초프의 회고록에서도 언급했듯이, 기본적인 군사 훈련을 받은 직업적 군인이 아니었고, ‘레닌그라드’ 작전 시 레닌그라드 지역 중앙위원회의 제2서기(부위원장)로 부상한 인물로서 전시에 부여하는 임시 계급 중장이었다. 그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의 정책을 북한 공산당에 주로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실질적으로 북한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당시 소련의 군정조직은 아래 표와 같다.

소련 군정 조직
소련군의 전술군 부대 본대가 평양에 진주한 1945년 8월 26일 점령군의 사령관 치스챠코프 대장의 북한에 대한 성명이 처음으로 발표되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60)
조선 인민이여. 소련군대와 동맹국군대는 조선으로부터 일본의 침략자를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의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새로운 조선의 한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심의 결과이다. 그것과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의 영웅적 투쟁과 근면한 노력에 의해 달성된다. 일본 통치하에 암울했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자.(중략) 조선인이여. 기억하라. 행복은 당신의 수중에 있다. 당신은 자유와 독립을 취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당신의 노력에 달려있다. 소련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에 창조적인 노력에 착수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조선 인민 자신이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해야 한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의 경영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일본인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를 회복하라. 새로운 생산기업을 개시하라. 소련군사령관은 모든 조선기업소의 재산을 보호하고 그 기업소의 정상의 작업을 보장하기 위해 모든 협의를 할 것이다. 조선의 노동자들이여. 노력에 의한 영웅심과 창조적 노력을 발휘하라. (중략) 해방된 조선인민만세.
이 성명문의 내용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고통의 질곡에서 벗어나 독립을 희구(希求)하는 한민족의 감정을 고려하여 작성된 것이었지만, 점령군의 포고 형식과는 다른 단순한 문학적인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적어도 성명에 의하면 소련군의 진주는 조선민족의 독립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고 금후 모두는 조선인 자신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는 것처럼 포고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그 성명을 통해 조선인을 표면에 세워 북한을 점진적으로 개혁할 방침이었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진주군으로서의 임무에 종사할 것을 표명하여 한국민에게 해방세력으로서의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하였다. 제25군사령관 치스챠코프 대장은 또한 일본인들에 대한 식량배급, 포로문제 등에 관해 언급한 후 “새로운 정권이 각도에 성립한 후에 통일정부를 세울 것이나 신정부의 소재지는 반드시 경성에 한하지 않으며, 또한 북위 38도선은 미⋅소 양군 진주의 경계선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정치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162)
그러나 소련군은 북한의 인민위원회에 대하여는 보안대를 조직하여 질서 유지를 맡도록 승인하고 기본적인 일체의 무장부대의 존재를 승인하지 않았다. 치안 유지는 소련군사령부가 각지에 설치한 소련군 위수사령부의 관할이었다. 위수사령부는 각도⋅시⋅군에 망라하고 지역의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보조하기도 하며 또는 그 감시의 역할을 맡았다. 사실 그 임무는 아직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지 않은 지역에는 경찰 군사조직으로서보다 행정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위수사령부는 1945년 9월말 시점에서 북한의 주요한 지역 54개소에 설치되어 있고 그 후 수는 더욱 증가하여 113개소에 달했다.163) 각지의 인민위원회에 대하여 정책방침을 내기도하고 행정면에서 기술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10월 3일 수립된 소련군 민정부였다.164)
이를 통해 소련은 북한에 대한 구체적인 점령정책을 가시화해 나갔다. 그 이전까지는 아직 순수한 군사적 점령이었다. 민정이 수립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적 점령이 시작되었다. 1945년 9월 23일 스티코프 장군은 평양을 방문하여 제25군 사령관 치스차프 대장, 군사 부사령관 라구치 중장, 참모장 펜코프스키 중장, 제25군 군사회의 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 등 군사 및 정치 장군들과 회담하였다.
이 회담에서 스티코프 장군은 평양에 소련 민정관리국(민정사령부, 또는 로마넹코사령부)을 설치하기로 하고, 국장에 로마넨코(Romanenko) 소장을, 부국장 겸 정치지도부장에는 이그나체프(Ignatiev) 대좌를 임명하였다. 새로 기용된 로마넨코 소장은 만주지역 갈림에 있는 제35군의 군사회의 정치위원이었다. 1945년 9월 말경 로마넹코 소장과 이그나체프 대좌는 평양에 도착하여 북한에 대한 본격적인 소비에트화 정책을 위한 정치공작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25군의 군사회의 정치위원인 레베데프 소장은 해방 직후 혼란한 북한의 정치정국을 스티코프 장군의 지시를 받아 ‘인민정치위원회’의 발족 등 북한의 초기 점령군 정책을 시행했고, 후에 미⋅소 공동위원회 소련측 위원으로 참가, 수석대표인 스티코프를 보좌했다. 새로 부임한 로마넨코 소장은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만드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또 북한을 소비에트화하고 친소정부를 수립하는데 항상 스티코프의 지시를 따랐다.
민정관리국의 부국장 겸 정치지도부장인 이그나체프 대좌는 항상 김일성 일파(빨찌산파)를 뒤에서 직접 조종하고 후원한 인물이다. 스티코프 장군이 후에 초대 북한 주재 소련대사로 부임하자, 이그나체프 대좌는 대사의 자문관으로 소련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정치 및 각 분야에 걸쳐 대사(大使)를 자문 및 보좌하였다.
스티코프는 당시 연해주 군관구의 군사회의 정치위원으로, 북한 주둔군인 제25군 군사회의 정치위원의 상급기관으로서 북한지역에 스탈린의 공산화정책 수행여부를 감독하는 한편 미⋅소 공동위원회 소련측 수석대표로 임명되어 1946년 3월 20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1차 위원회에서 스티코프는, 한국은 장차 대소 공격의 기지가 되어서는 안되며 소련에 대하여 우호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는 한반도를 공산화하겠다는 소련군의 정책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1947년 5월에 개최된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 주장대로 회담이 진행되자, 이미 계획된 바에 따라 1947년 9월 26일 스티코프는, “한국에서 미⋅소 양군대가 철수하여 외국군의 아무런 협조 없이 그들 스스로가 정부를 구성할 기회가 주어야 한다고 본 대표는 생각합니다. 미⋅소 양군이 1948년 초에 철수하자는 본인의 제의를 만일 미국 군대와 합동으로 동시에 한국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선언합니다”라고 한반도에서 미⋅소 양군의 철군제의를 발표하였다.
이는 한반도에서 철군하자는 최초의 공식 발언이다. 사실상 스티코프 장군이 철군을 발언했을 당시(1947년 9월) 북한에서는 ‘북조선인민집단군 총사령부’를 구성하고 예하에 2개 보병사단, 1개 혼성여단을 만들어 놓은 지 4개월 후이고 또 ‘북조선 인민위원회’가 구성된 지는 7개월 후의 일이었다. 이렇게 사실상의 친소(親蘇) 정부와 군대가 조직된 이상 10만이 넘는 소련 점령군이 북한에 계속 주둔할 필요성이 없어진 시점이라 할 수 있다.
민정(民政)은 각 부분의 점령정책을 담당할 전문가들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소련군 장교였다. 이들의 총 숫자는 1945년 9월에는 약 200명에 달했으며 점차로 줄어들어 12월에는 60명으로 줄어들었고 1947년 7월에는 30명 정도로 축소되었다. 소비에트민정의 내부구성은 임시인민위원회와 완전히 똑같이 10개의 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소비에트 민정은 지방정부는 갖지 않았다. 지방은 위수(경무)사령부를 직접 통제 명령한 것은 아니었다. 지방 위수사령부는 어디까지나 제25군사령부 소속이었다. 지방수준의 소비에트 민정의 활동은 포고문들과 북한에 진주한 직후에 도와 군에 설치되었던 위수사령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레베테프에 의하면 소비에트 민정은 도의 고문들을 통하여 위수사령부의 활동을 지도했는데, 고문들은 소비에트 민정에 직속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도에서는 소련군사령부를 대표하여 도의 위수사령관을 예하에 두었다.
제25군 군사회의의 명령에 따르면 제25군은 전 북한지역에 113개의 위수사령부를 설치하여 점령정책을 집행해 나갔다. 따라서 소련군정은 지방 소비에트민정조차 설치하지 않고 초기에는 직접적으로 군사 통치를, 나중에는 한국인 인민위원회를 통한 통치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9월 28일 현재 54개의 지방위수사령부가 가동되고 있었다.
위수사령부는 최소한 시⋅군 수준에까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북한은 총 89개 군이 있었는데 위수사령부가 군의 숫자보다 더 많아 도와 시를 포함하더라도 113개나 되었던 것은 큰 도시에도 독자적인 위수사령부를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군은 대략 4만 명 정도가 북한의 전국에 걸쳐 주둔하였다.지방에는 위수사령부를 구성하여 거기에 소비에트 민정 담당 장교를 배치하였던 것이다.

위수사령부 조직편제와 도별 담당관
소비에트 민정은 군사편제로는 제25군의 편제에 있으나 치스챠코프의 지휘를 받지 않고 제25군 군사회의의 통제를 받는다. 제25군 군사회의 구성은 레베데프,166) 로마넨코, 샤닌,167) 체렌코프, 프르소프 등 5명이었다. 이 군사회의는 제25군의 직속 상급부대인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의 지휘를 받았다.168) 따라서 사실상의 중앙정부의 기능을 수행하는 민정부를 통솔한 로마넨코 소장과 그 보좌를 맡은 이그나체프169) 대좌 등 2인이 사실상의 소련군에 의한 민정을 통괄한 인물이었다.
한편 이것과는 별개의 기구로서 사령관 직속의 정치고문부가 설치되었다. 정치고문부에 있어서 점령통치 전반에 관한 정책작성 등을 담당한 것은 동경의 소련대사관의 근무경험을 가진 발라사노프170)였다. 또 정치면에 있어서 소련군을 총지휘하고 민정부의 지휘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군사평의회 위원 레베데프 소장이고 실질적으로 소련군의 부사령관의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레베데프의 상관은 쉬티코프 대장이었다.
이러한 소련군사령부는 민정부⋅정치고문부 그리고 각 지역의 소련군 위수사령부를 가지고 점령통치를 행한 3위 일체의 기구를 만든 것이다. 주지하듯이 소련군 당국은 “북조선에 소비에트질서를 수립할 생각은 아니고 조선을 일본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하는 것 그리고 민족자결의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것에 그 진주목적이 있는 것”이라 재삼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것과는 전혀 다르게 북한을 착실하게 소비에트 구축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171)
소련군은 군정기구를 갖추어 나가면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무장해제를 실시하는 한편 38도선 요소요소에 진지를 구축하고 기관총을 설치하여 남⋅북으로 오가는 통행인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하였으며 남⋅북을 잇는 경의선, 경원선 등 주요 철도와 도로를 차단하는 등 교통통신을 차단하였다. 이렇게 장벽을 친 소련군은 군정을 실시하기 위한 조치로 우선 인민위원회의조직에 착수하였다.172) 소련군 사령관 치스챠코프 대장은 평안남도에 설치된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한 인민위원회를 승인하고 이어 각도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앞으로 통일정부를 만들되 신정부의 소재지를 서울에 국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천명하였다.173)
이는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겠다는 의사의 표명이었으며 한민족이 주인이 되는 조직이 주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충분하여 북한지역의 인민위원회 결성을 촉진하였다. 그리하여 북한에서는 해방과 더불어 조직되기 시작한 여러 정치단체들이 통폐합되고 8월 24일부터 9월말까지 도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각 인민위원회는 일본인 관료로부터 행정기관, 경찰관서, 경제기구 등 모든 국가기관을 접수하여 행정권을 인수하였다. 소련군정 당국은 인민위원회위원장에는 한국인을 기용하되 소련군 장교를 고문역에 임명하고, 그들이 입북(入北)시 대동한 소련계 한인을 요직에 배치하였다. 그러므로 이 기구는 외관상 자주적으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소련군정 당국에 의해 지배되었다. 따라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인민위원회 조직은 민족진영세력이 점차 배제되면서 주로 소련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갔다.
이러한 공작은 10월 14일 소련군정 당국이 평양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김일성을 북한 주민 앞에 내세움으로써 절정에 달하였다.174) 그는 이때부터 소련군정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어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소련군정이 김일성을 권력전면에 내세우고 공산당이 민족주의자들을 말살하려는 공작을 진행하자 이에 분노한 조만식 등 북한 5도 민족주의 세력 대표자들은 북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북한 주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소련군정 당국은 11월 18일 5도 인민위원회를 통괄하는 5도 행정국을 설치하고 산업⋅교통⋅체신⋅농림⋅사업⋅재정⋅교육⋅보건⋅사법⋅보안의 10개국으로 된 행정체제를 정비한 후 김일성을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에 앉힘으로써 그를 북한 공산당의 제1인자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소련군은 북한에 군정을 실시하면서도 남한과는 달리 공산당 조직으로 노동당 결성을 조장하였으며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간접적 행정을 실시하였다. 소련의 북한 정책은 소련에게 우호적인 위성정권을 수립하여 소련 국경의 항구적 안전보장을 확보하여 태평양 지역에서의 전략적 정치적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175) 소련의 군정이 실시된 지 약 4개월만에 38도선 이북에서는 소련 군정에 의한 공산화 체제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1946년 2월에 소련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소위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케 하고서는 “가까운 장래에 국제적 반동세력에 의한 여러 가지 요소를 타파하고 민주국가로서 전 한국의 통일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소련은 과거 3년간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 크게 발전하고 있으며 장차 더욱 발전하리라고 기대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소련은 38선 이북지역에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진주하면서, 미국보다 먼저 소위 ‘확보한 지역에서의 사회주의 구축’176)을 위해 행동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즉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의 지령에 의하면, “북한의 민간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177)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북한에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하는 소련군의 대북한 정책을 명확히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178)
그리고 소련은 ‘한반도내 우호적인 국가수립’이라는 기본목표를 이행하게 되는데, 이것은 소련 극동과에서 작성된 다음의 내용에서 확인된다.
한국이 장차 일본만이 아니라 극동으로부터 소련에 압박을 가하려는 임의의 다른 강대국이 소련을 공격하는 전초기지로 전환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만큼 한국의 독립은 효과적이어야 된다. 소련과 한국의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한국과 소련 극동지역의 안전을 보증하는 보다 현실적이고 올바른 방향이 될 것이다.179)
소련의 대한정책 방향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구상된 것이었으며, 소련에 對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소련을 공격하기 위한 전초기지가 되어서는 안되며 장차 수립될 정부는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여야 한다는 기본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