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정 당국과 김일성 일파는 보안대와 철도경비대가 증편되고 평양학원, 중앙보안간부학교, 보안훈련소, 철도경비훈련소 등에서 군 인력이 양성되자 여러 기관을 통합하여 지휘체제를 일원화할 것을 검토하였다.

1946년 7월과 8월, 2차에 걸쳐 김일성을 비롯한 최용건(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장), 김책, 강건, 안길, 오백용, 박영순 등 소련파와 무정, 박일우, 주연 등 연안파들이 한 곳에 모여 군사력 건설에 관하여 토의하였다.

그 결과, 군사력 건설과 유관한 부대들을 통합 지휘할 기구로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고 해방 1주년이 되는 1946년 8월 15일 평양 서기산(瑞氣山) 무덕전(武德殿) 자리에 보안간부훈련대대부를 창설하였다. 이는 명칭상 보안간부훈련소의 지휘부인 것처럼 비추어졌지만, 실제로는 정규군대의 위장명칭이자 북한군의 최고 참모부였다. 이 때 훈련대대부(사령부)의 주요 간부진은 다음과 같다.

훈련대대부 사령관 : 최용건
부사령관겸 문화 부사령관 : 김 일
포병 부사령관 : 무 정
총참모장 : 안 철
후방부사령관 : 최홍극
작전 부장 : 유 신
간부 부장 : 이 림
통신 부장 : 박영순(통신부 부부장 : 이청송)
공병 부장 : 황호림(공병부 부부장 : 박길남)
정찰 부장 : 최 원
사령관 총고문 : 스미르노프 소장

이들은 당시 북한내 최고 실력자이자 군사 경험자들이었다. 그런데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주요 간부 가운데서도 항일유격대집단의 최용건, 김일(金一), 안길, 박영순 등이 요직을 차지하였다. 여기서 김일성의 1947년 보고에 따르면,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창설은 김책이 주도했다고 하였다. 간부대대부의 최초편성은 대대부 본부와 경위대, 평양학원, 중앙보안간부학교, 철도경비대, 보안훈련소를 예하에 두고 사령관이 직접 지휘하였다.

이후 김일성 등은 항일유격대집단을 추가로 투입함으로써 정규무력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김일성은 보안간부훈련소 제1소 문화부소장에 서철(徐哲)을 임명하였으며, 1946년 초가을 중국 동부지방에서 최광을 소환해 참모장에임명했다. 최광은 200명 가량의 인원을 선발하여 함께 북한으로 귀환하였다.

보안간부훈련소 제2소 소장은 강건(姜健)이 맡았다. 1946년 9월에는 소련 군사고문단(스미르노프 소장)이 북한에 도착하여 각 훈련소와 군사학교에 배치되었다. 소련 군사고문단의 임무는 군 장교들을 훈련시켜 정규군 편성을 촉진시키는데있었다.

김일성은 46년 10월 7일 보안간부훈련소 제1소 1분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보안간부훈련소가 “인민의 참다운 무장력이며 앞으로 건설될 인민군대의 핵심부대”라고 지적하면서 항일유격대집단의 ‘백절불굴의 혁명정신’을 강조하였다. 항일유격대집단은 김일성에게 충실한 정수분자만을 간부로 선발한 결과 보안대는 점차 항일유격대집단의 상설 무장력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으로 강계(江界)에 설치된 제3분소 최현은 훈련소를 자의적으로 운영하고 강계군의 간부인선까지 전횡(專橫)하였지만 지방당은 이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최현의 비서 장창호가 문제를 일으키고 무장 탈영하여 월남한 사건에 대해서도 최현은 아무런 책임추궁도 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승진하였다. 사건의 책임을 물어 강계(江界)군당 위원장 리동림이 해임당하고 군당상무위원회가 해체된 사실과 크게 대조되는 것이었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편성(1946. 8)

 

훈련대대부는 사령부 예하에 교도중대, 위생소대와 3개 대대를 두었는데 1개 대대는 다시 4개 중대로 구분되어 해주, 사리원, 강계, 신성천, 성진, 길주, 서천, 상삼봉, 함흥, 심포, 양덕, 원산 등지에 각각 배치하였다. 이상과 같은 편성을 완료한 후에는 우수한 병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각 간부양성기관에서는 더욱 충실한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훈련 안을 작성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예하부대 중 철도경비대와 보안훈련소는 몇 차례의 통합, 증․개편을 통해 정규사단의 모체로 변모해 갔다. 1946년 11월 10일에 철도경비대와 보안훈련소를 통합 개편하였는데, 개천에 있는 보안훈련소(제 1, 2, 3분소 포함)와 개천과 나남에 있는 철도경비훈련소를 통합하여 개천에 보안간부 훈련 제2소를 그리고 철도경비대를 해체 흡수하여 평양에 보안간부 훈련 제3소를 설치하여 철도경비 13개 중대는 3개 대대로 개편하여 훈련 제3소의 예하 부대로 되었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편성(1946. 11)

 

당시 개천의 훈련 제1소를 개천사단 또는 제1사단, 나남의 훈련 제2소를 나남사단 또는 제2사단, 평양의 훈련 제3소는 철도경비사령부라고 호칭하였다. 1947년 3월 철도경비대를 주축으로 편성되었던 평양의 훈련 제3소는 해체되어 본부는 훈련대대부 사령부로 통합되고 예하의 3개 대대는 종래의 철도경비 임무를 각 도 보안대에 인계하고, 3개 훈련소에 분산 배속되었다.

즉, 제1대대는 훈련 제1소, 제2대대는 훈련 제2소, 제3대대는 훈련 제3소로 각각 배속 전환되었다. 그리고 해체된 평양의 훈련 제3소 대신으로 원산에 새로운 훈련제3소를 신설하였다. 이와 같이 신병훈련 기관인 3개의 훈련소가 모두 철도경비대를 주축으로 증․개편되었는데, 이 3개 훈련소는 북한 정규군건설의 중요한 모체가 된다.

 

북한군 보병사단 편제표

 

이들 3개 훈련소와 제1, 2, 3대대의 부대배치를 보면 북한 전 지역을 3개 지역으로 분할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평양 개천을 중심으로 한 훈련 제1소는 서부 지역인 해주, 사리원, 강계, 신성천에 각 중대를 배치하였고, 함북 나남을 중심으로 한 훈련 제2소는 동북부 지역인 성진, 길주, 서천 상삼봉에 중대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함남 원산을 중심으로 한 훈련 제3소는 중동부 지역인 함흥, 신포, 양덕, 원산에 배치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3개 광역으로 분할 배치된 각 훈련소에서는 신병을 대량 모집, 훈련하여 이들 중대를 모체로 하여 하나씩 부대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북한 정규군 건설을 위한 출발인 것이다. 이 3개 훈련소는 얼마 후 각 지역별로 사단 및 여단으로 확장하게 된다. 최초 훈련병의 모집은 각 지역별로 만18세부터 25세까지의 청년들을 지원병 형식으로 모집하다가 훈련병 소요가 증가되자 공산당원이나 민청요원 등을 집단적으로 훈련소에 입소시켰다.

이들에 대한 훈련은 최초에 일본군이 사용하던 38식 소총으로 장비시켜 제식훈련과 소총훈련을 위주로 하였으나. 그것도 소총이 부족하여 세 사람당 1정씩의 비율로 휴대하였으며, 기관총은 중대에 1정 정도가 배당될 정도로 빈약한 장비를 갖추어 훈련을 시작하였고, 복장은 북한에서 면사로 급조한 군복이었다.

1947년 1월 소련 당국과 북한당국(당시 북조선 임시인민회의) 사이에 무기인도에 대한 협정이 맺어져서 북한은 주로 농산물로 소련무기와 장비에 대한 대금을 치르게 되었다. 1947년 1월 군 장비를 실은 소련 화물선 2척이 진남포항에 입항하여 하역하였는데, 그 내용품들은 소련제 기관단총을 비롯한 소총과 경 및 중기관총, 그리고 각종 박격포였고, 소련군이 2차대전시 노획한 독일 군복도 포함되어 있었다. 1947년 4월까지에는 전차나 자주포 등의 중무장을 제외한 기본화기 및 장비들이 소련제로 구비되었으며 전반적인 무장수준은 소련군의 경보병사단에 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각종 소련제 무기들은 평양학원, 북조선보안간부학교, 각 훈련소, 각 대대에 보급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에 의하여 보안간부훈련대대부로 하여금 북한군의 모체가 되도록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북한군의 창군이었으며 단일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훈련대대부는 군사시설을 점차 확충하면서 병력증강과 군사훈련을 병행하였으며 각 훈련소들은 사단편성시 그 모체가 되었다. 대대부의 병력은 18세 이상 25세까지의 청년으로 모병하였으나 기피현상이 심해지자 강제 징집을 시행하여 민청원과 당원을 집단적으로 입소시켰다. 장비는 초기에는 일제 38식 소총으로 무장하였으나 점차 소련제 소총과 탄약을 확보하고 소련군 장교를 고문관으로 두어 조직적인 체계로 급속히 성장하였다. 이리하여 북한에서의 공식적인 창군은 시간 문제였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예하부대는 개편과 통합을 몇 차례 거치며 정규군의 모체로 변모해 갔다. 보안간부훈련소가 신병을 대거 모집하여 각 지역별로 사단 및 여단으로 확장되면서 북한 정규군의 원형이 완성되었다.

 

제1경보병사단 현황 (1946. 12. 25 현재)

 

1946년 12월 25일 현재 북한의 경보병사단의 현황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이
미 이 시점에 사단사령부 병력은 100% 충원되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군관 충원
비율은 총 정원 815명에서 146명의 결원을 보여 82.09%였다. 반면에 병사의 충원비율은 총 정원 6,742명 가운데 3,053명만이 충원됨으로써 45.02%에 머물렀다.

 

제2경보병사단 현황 (1946. 12. 30 현재)

 

여기서 병사 충원이 100% 완료된 훈련대대를 제외하면 그 비율은 42%로 떨어진다. 이와 같은 현상은 장래 병사를 집중 징모하여 부대를 확충하려는 조치였다. 제2경보병사단의 전체 군관보충비율은 815명중 748명으로 91.78%, 하사관 충원 비율은 2,310명중 788명으로 35.11%, 병사 충원비율은 6,982명중 2,907명으로 41.64%를 보였다. 군관의 충원비율이 92%에 이른 것은 향후 정식 군대 창설을 염두에 두고 오랜 기간 전문훈련을 거쳐야 할 필요가 있는 장교를 우선적으로 충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훈련대대부의 창설 이후 증․개편 과정에서 나타난 특징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당시 북한에 산재된 무장부대들을 통합하여 훈련대대부라는 군사적 단일 지휘체제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김일성 직계인 최용건, 안길, 김일(金一) 등으로 하여금 이 무장부대들을 장악하게 한 점이다.

둘째, 이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라는 위장 간판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남한과 미군을 의식하여 창군을 은폐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셋째, 이 훈련대대부는 장차 북한군의 모체로 발전시킬 계획에 따라 정규군 편성으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넷째, 소련군이 많은 무기와 군복을 때맞추어 보급하고, 소련 고문관을 각 군사학교와 훈련소에 배치한 사실은 장차 북한군 창설을 위해 소련군이 배후에서 북한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명확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는 점이다.

1946년 8월 15일을 기하여 창설된 보안간부훈련대대부는 1947년 5월 17일까지 약 9개월간에 걸쳐 막대한 병력증강과 군사시설의 확장을 완수하였으나 아직도 북한군에게는 정식계급이 없었다. 다만 군관(장교)과 전사(사병)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직책에 따른 상하 구별만 있었다. 여기서 그 때까지 소련군사령부에 의한 그 북한군 편성의 배후조종이 비로소 표면화되었고 그 후부터는 소련 군사고문관들이 각 훈련소 및 간부양성기관, 사령부에 배치되어 전반적인 운영을 관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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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ey Network Architecture (JNA) 최종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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