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1949년 초부터 북한군 확장과 국민 총동원을 위하여 군 징집제도를 자원입대에서 공개 강제징집으로 전환하여 보안대의 주관 아래 병력을 취합하였고, 모든 북한의 고급중학과 대학에 배속장교를 배치,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17세부터 50세까지의 전 북한 주민에게는 기본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또한 북한은 민청훈련소를 개편하여 3개 예비사단으로 편성하였는데 신의주에 제13예비사단, 숙천에 제10예비사단, 평강에 제15예비사단을 각각 신설 배치하였다. 즉, 1949년 10월 북한은 3개 민청훈련소를 설치하여 17세부터 30세까지의 청장년을 강제 징집하여 이들 예하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 지방 청년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훈련소는 실질적으로 보병사단에, 훈련지소는 보병연대에 상당하였다.
제1민청훈련소는 평안북도의 징집자를 대상으로 신의주에 본부를 두고 예하에 제1훈련소(신의주), 제2훈련소(남 신의주), 제3훈련소(용암포)를 설치하여 신병을 훈련, 1950년 3월에 여기서 양성된 병력과 중국에서 조선의용군 출신 1개 대대를 인수받아 사단편제로 편성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6월 중순에 정식으로 북한군 제13보병사단이 되고 사단장에 빨치산파의 최용진이 보임되었다.
제2민청훈련소는 평안남도의 황해도 지역의 징집자를 대상으로 숙천에 본부를 두고 예하의 제4, 5, 6훈련소에서 신병을 훈련, 1950년 3월부터 사단편제로 편성하기 시작하여 1950년 6월 중순에 사단편성을 완료하여 북한군 제10보병사단이 되고 사단장에 이방남이 보임되었다.
제3민청훈련소는 함경북도의 회령에 본부를 두고 예하의 제7, 8. 9훈련소에서 신병을 훈련하였고, 1950년 3월부터 사단편제로 편성하기 시작하여 1950년 6월 중순에 사단편성을 완료하여 북한군 제15보병사단이 되고 사단장에 박성철(朴成哲)이 보임되었다.
신편된 3개 사단은 모두 3개 보병연대와 포병연대 및 지원부대로 구성되어 있어 타 전투사단에 비해 편제는 동일하나, 장비와 병력 수, 훈련면에서 전력이 떨어지는 예비사단 수준으로 남침작전 초기에는 직접 참전하지 못하고 7월 이후에 참전하게 된다.
한편 1948년 10월 15일 진남포(鎭南浦)에서 창설되었던 제4독립혼성여단은 1950년 4월 제2사단에서 1개 연대와 조선의용군 출신 1개 연대(중국 정주에서 중공군 독립 제15사 편성시 별도로 1개 독립연대를 편성 입북한 연대)를 인수받아 북한군 제4보병사단으로 승격하였다. 예하에는 제16, 17, 18연대와 포병연대로 구성되어 완편 사단이 되었고 사단장에는 연안파인 이권무(李權武)가, 사단참모장에는 허봉학(許鳳學)이 보임되었다.

북한군 사단의 증편표 (1948. 10. – 1950. 6)
이리하여 북한군은 증강되었고 특수부대인 제105전차여단, 122㎜ 포병연대, 고사포연대, 기동보병연대, 공병여단, 통신연대를 비롯하여 제1, 제2군관학교 및 북방유격대 등 그 병력은 총 14만 8,680명에 달하였고 그밖에 내무성의 각종 경비대와 보안대의 병력이 34,000명에 이르렀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3개 사단의 신편과 4사단의 완편, 중공군에서 1개 사단(제12사단)이 추가 편입됨으로써 북한 인민군은 총 10개의 보병사단(제1 · 2 · 3 · 4 · 5 · 6 · 12 · 10 · 13 · 15사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북한군 보병사단은 제5, 제6, 제12사단 외에도 중공군이나 소련군에서 입국한 자들이 보충되어 전체 병력의 1/3이 전투유경험자들이었고, 완전 편성은 11,000명이었다. 이들은 소련제 61㎜ / 82㎜ / 120㎜ 박격포, 76.2㎜ / 122㎜ 야포, 45㎜ 대전차포, SU-76 자주포 등으로 장비되어 강력한 화력을 보유하였다